‘내가 겪은 8.15’_ 해방 당시 나는 황해도 재령에서 국민학교 교사 _ 송재현 (의대 46)

이번에 광복 (해방) 73주년을 맞이하여, 동문으로부터 광복 당시, 감회, 기억, 당시 상황 등 기고를 원한다고 동창회에서 통지가 와서 몇 자 적어 보았다.

1945년 해방된 해는 내 나이 17세 때로 서울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한 해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1941년 12월 7일, 우리 모든 학생은 강당에 집합되어 이와무라(岩村)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지금 막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였다고 들었다. 이어 그는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엄숙히 말했다.

일본은 그 후 일지(日支)전쟁에서 확대되어 동남아 전체를 석권하고 버마(지금의 미얀마) 까지 진출 전전승승하였으나, 우리가 4학년 때에는 여러 지역 특히 해군 전투에서 미국에 많이 패하여 거의 패망이 다가와 있었다. 그때 중학교는 5년제였는데 내가 4학년 때 군인이 모자라 군인동원 목적으로 4년제로 변경하여 1945년 3월에 나는 5학년생과 같이 졸업하게 되었다.

나이 든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당시 일본은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지휘하에 최후의 1인까지 미국과 싸운다고 발악하였다. 1945년 8월 6일 일본 본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지고, 8월 9일 다시 큐슈 나가사키에 또 한발의 원자폭탄이 터지자 드디어 일본 천황은 떨리는 목소리로 친히 라디오를 통하여 미국에 항복을 선언하여 8월 15일 전쟁은 끝이 났다.

나는 1945년 3월 중학 졸업 후 의사가 되고자 고향 가까운 평양의 의학전문학교(평의전)에 지원했으나 일본 학생들만 뽑아 떨어졌다. 그래서 고향 재령의 국민학교에서 17세의 젊은 나이로 촉탁 교사로 생활을 할 때 8.15 해방을 맞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당시 우리는 일본 교육만 받아서 3.1 운동, 중경의 임시정부 등 전혀 몰랐고, 처음으로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이름을 들었다. 김구 선생은 바로 내 고향 재령 옆 안악에서 출생하셨단다.

재령은 황해도에서 해주, 사리원 다음 셋째로 큰 읍으로 농업중심지(나무리 벌판), 황해도 유일의 중학교 소재지(명신중학교), 또 기독교 신앙의 발상지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일본 식민지 교육은 더욱 철저하였기 때문에 그런지, 또 일본이 항복하고도 아직 남아 있는 무장 경찰 때문에 그런지 해방이 되고도 거리에 나와 만세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당시 이곳은 태극기 보기가 힘들었다. 우리집 사람 이야기인데 그때 어렸을 때 서울 돈암국민학교 다닐 때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학교 생도들이 일본이 망했다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참 웃기는 이야기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국내외 각처에서 항일 구국 투쟁을 펼쳐왔던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몇몇 강대국의 논리에 의해 우리 국토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얄타회담에 의하여 38선이 그어져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이북은 소련군이 오고 이남은 미군이 온다는 소식이 퍼졌다.

해방되던 날, 나의 친구 김봉영(재령 명신중 졸)은 제일 먼저 재령 뒷산에 있는 일본 신사(神社)에 가 불을 질렀다. 신사 옆에는 경찰서가 있었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리고 재령에는 곧 소련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아직 일본 경찰서도 있고 무서워 밖에 나가 해방 만세를 부를 용기들도 없었으며 조용히 집에서 라디오만 듣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한곳으로 몰려 있었고, 일제 앞잡이 노릇 하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어느새 공산청년동맹이 생겨 모든 기관을 점령하고 군인민위원회가 생겼는데 그 위원장에 송봉욱 우리와 꽤 가까운 친척이 되었다. 그는 완전히 공산주의자였던 것이다. 곧 소련군 환영대회가 열리고, 완전히 김일성의 지시를 받는 조직체가 되었으며, 옛날 지주는 다 없애고 농지는 모두 농민에게 무상분배하였으며, 부자들의 재산은 몰수하였다.

그는 한 때 나를 불러서 가 보니, 나 보고 모스코바로 유학을 보낼 터니 가라고 하였다. 나는 이남으로 갈 계획을 하고 있어서 거절하였다.

그는 곧 농업상(농무장관)이 되어 평양 김일성 밑으로 갔다. 만일 내가 모스크바로 유학을 갔더라면 높은 자리 하나 받고 6·25전쟁전쟁 때 이남으로 내려와서 김일성 부하로 일하다 이미 죽었을 것이다.

드디어 소련군이 재령에 입성하였다. 우리는 동원되어 환영하러 나가보니 이건 군인이 아니라 모두 키가 작은 만주 벌판의 거지 떼 같았다. 어떤 군인은 긴 빵을 어깨에 메고 옷은 더럽고, 그나마 인솔 장교는 서구인으로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 후 이 더러운 군인들은 시내를 활보하며 돈 되는 것은 모두 다와이(뺏음)하고…

특히 손시계만 보면 모두 뺐어 갔다. 특히 불쌍한 것은 일본인 여자들로 이 더러운 군인놈들의 강간대상이 되었다.

평양에는 가짜 김일성이 소련 빽으로 들어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공산국가를 세웠다. 나는 곧 이남으로 갈 결심을 하고 친구 최효원(명중 졸, 서울대 문리대 졸, 후에 6.25 전쟁 시 육군 대령이 됨)과 같이 도망쳐, 해주를 거쳐 밤에 몰래 청단을 지나 38선을 넘어 드디어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 해 1946년 봄에 나는 서울대 (구 경성제대) 예과(청량리) 의과(理乙)에 합격 서울대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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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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