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8.15’_ 고향 찾아 4천리 길 _ 최용완 (공대 57)

1945년 8월 15일이 지난 며칠 후, 우리 가족 여섯 사람의 목숨을 건 여정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탄광을 가진 만주의 무순에 살고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고 38선을 넘어 전라남도 순천,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는 대장정이었다. 그때 내 나이 7살, 아버지의 나이 35세, 어머니의 나이 33세이셨다. 형은 9살, 누이 4살, 막내 여동생은 아직 2살이 채 되지 못한 나이였다.

소련군들은 밤낮없이 만주 무순 우리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몹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군인들 모습이었다. 손목시계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손목시계만 보면 빼앗아간다고 소문이 났다. 홀연히 이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일본 회사에서 근무하셨던 아버지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 남매를 데리고 고향 땅,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어머님은 애태워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나도 어머니의 두려움을 함께 느꼈다. 어느 중국인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며칠 후, 집에 돌아오셨지만, 어머니와 다시 만날 곳을 약속하고 곧 집을 떠나셨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시장에 들고 가서 팔고 그 돈으로 금반지, 금목걸이, 금팔찌를 사 오셨다.

무순을 떠나서 며칠 후에 압록강 가까운 시골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신의주 건너편에 단둥에 머물며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찾았다. 소련군들이 국경을 봉쇄하였기에 물길을 아는 나룻꾼은 값을 많이 주어야 찾을 수 있었다. 새벽 일찍이 나룻꾼은 우리를 깨워 배를 타도록 서둘렀다. 형과 나는 금들을 안으로 꿰매 숨긴 외투를 입고 아버지는 등에 짐을 메고 어머니는 누이 손을 잡고 막내를 업고 작은 나룻배 바닥에 모두 엎드려 위에 포장을 덮어씌웠다.

배꼬리에 노가 물을 젓는 소리 만이 안개 낀 압록강 수면 위로 번지는 두 시간쯤 지났을까. 홀연히 소련군 따발총 소리가 따따따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였고 가끔 장총 소리도 따쿵따쿵 울렸다. 형과 나는 가느다란 포장 틈새로 밖을 보았지만, 칠흑같이 어둡고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총알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요란하였다. 가끔은 총알이 배 옆에 물 튀는 소리도 들렸다. 아버지는 두 딸과 어머니의 머리를 이불로 감싸고 엎드려 기도하고 계셨다.

총소리는 차츰 조용해졌고 새벽 동틀 무렵에 우리는 북한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우리 가족은 달구지에 몸을 실기도 하고 차에 타기도 하여 이틀 후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 기차역 앞에 광장은 넓고 쓸쓸해 보였다. 가까운 여관에서 우리 가족은 몸을 풀었다. 며칠 머무는 동안 아버지는 개성으로 가는 기차 편을 알아보고 우리 형제와 누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소련군과 인민군의 축구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 뒤에서 젊은이들이 앞으로 밀려들어 누이가 앞으로 넘어지며 울었다. 어디선가 소련 헌병이 달려와서 북한 젊은이의 뺨을 때렸다.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 우리 친척 같은 젊은이의 뺨을 때리는 순간 내 어린 가슴에도 아픔을 느꼈다.
기차는 평양역을 떠나 남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데 기차 안에 설 자리도 없고 기차 옆에 매달리고 지붕 위에도 타고 기차 몸통은 온통 사람들로 감쌌다. 우리는 다행히 기차 안에 의자에 앉았지만, 바닥에 앉고 선반 위에 눕고 무더운 땀 냄새는 숨이 막혔다. 얼마 후, 몇 자리 건너편에서 어느 여인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고 창밖으로 하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이 던져졌다.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에게 그것은 죽은 아기를 며칠이고 안고 우는 젊은 엄마를 옆 사람들이 보다 참지 못해 죽은 아기를 빼앗아 창밖으로 버렸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기차는 말없이 철길 따라 달려만 가고 있었다. 사리원을 종착역으로 기차는 멈췄다.

우리는 며칠 동안 시골길을 걷고 또 걸었다. 길갓집에 머물기도 하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며 끝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시월 들어 삼팔선이 가까워지며 날씨는 추워지고 드디어 인민군들이 삼엄하게 지키는 산길에서 우리는 모두 붙잡혀갔다, 아버지는 사 남매를 데리고 조용하셨고 어머니는 그들 중에 제일 우두머리인 듯한 장교를 붙들고 교섭을 하였다. 어머니 손가락에 금반지를 빼주는 듯하였다. 장교는 우리를 인솔하고 계곡에 내려왔고 계곡 건너편에 초록색 군복을 입은 남한 군인들과 미군들이 멀리 보였다. 인민군 장교는 우리에게 잘 가라는 듯 손짓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 감싸 안고 조심스럽게 계곡의 외다리를 걸어 넘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미군 헌병들이 우리를 검색하고 곧 우리 몸에 DDT 살균 약 가루를 몸 안팎으로 덮어씌웠다.

하얗게 눈사람 된 우리는 까만 눈만 깜박였고 어머니와 아버지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기다리시는 할아버지를 만났고 열차 편으로 며칠 후에 전남 순천에 도착하였다. 그때까지 두 달 동안 목마르고 영양실조 된 막내 나이는 2살이 지났으며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막내 누이를 잃었지만, 그때 부모님의 용단으로 우리는 자유의 나라, 이승만 정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음이 얼마나 감사한 운명이었는지. 6·25 전란을 겪으며 학교 다니고 4·19혁명을 거치며 대학을 마쳤다. 서울 남대문 중수 공사를 마친 후에 1966년에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에 유학을 왔다. 어려운 이민 생활의 건축가 세월이 지날 무렵 2008년에 남대문이 불에 타서 다시 찾아가 재건을 도왔다. 부모님들마저 20년 전에 우리를 떠나셨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 8·15 해방의 파란만장한 기억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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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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