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himosky를 기억하며


Kishimosky를 기억하며:    김옥영 (문리 52)

<김인수, 金仁洙 1902-1959>

내 고향이 어디냐 누가 물으면 물새 나르는 남쪽바다도 아니고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운다는 그런 고장도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내 나이 2살때 만주로 이사 갔고 내 인생의 여명은 그곳에서 번져온다.

내가 12살 갓 되었던 1945년까지 만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이 내 고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만주국은 일제가 만주 대륙침략의 야망을 위해 1932년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황제로 앉히고 만주국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국가였다. 나의 부친은 미쯔비시 회사 지점 직원으로 임명되어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추억에 깊이 각인된 곳은 만주의한 도시 하얼빈이다. 하얼빈은 송화강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중국 동북부의 공업 요지이기도 하다.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면서 도시가 세워졌다. 러시아는 하얼빈을 본진으로 흑룡강을 기점으로 북만주, 더 나아가서 만주, 한반도 전체를 노리다가 일으킨 러일전쟁 패전으로 다시 물러나게 된다. 하얼빈 도시초기 건설에 러시아의 관여가 많았기 때문에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곳이 기도하고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군 731부대도 하얼빈에서 얼마 멀지 않은 장소였다는 사실은 우리 부모는 어린 우리들에게 알려주지 안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10~20만에 달하는 백계 난민이 하얼빈에 착 했었고 ‘국적과 인종의 진열장’ 이라고 불리 울만큼 여러 인종과 각종의 무리들이 혼잡하게 섞여 살았던 국제도시기도 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독립운동 망명자나 법을 어긴 죄인들의 피난처이기도 했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장사꾼도 있었다.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 일자리 구하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

나의 하얼빈 기억은 언제나 한 곳에 머문다. 지금은 중앙대가라고 하지만 그 당시는 러시아어로 ‘키타이스카야’라고 하는 대로가 있었다. 유럽풍의 건물, 특히 art deco의 화려한 건물이 즐비하고 멋진 백계 러시아인들이 유행의 첨단의 의상으로 구두소리 경쾌하게 길가를 지나가던 도시였다. 하얼빈이라면 1930년대 당시 유행의 수도라 했고Paris에서 오는 유행은 그 곳을 거쳐서 상하이 로 건너갔다고 한다.

나의 부친은 미쯔비시 회사 하얼빈 지점의 부 지점장이셨다. 아버지는 상당한 classical music 애호 자였기 때문에 Harbin Symphony Orchestra의 한국인 음악인들과 친분이 두터우시고 정기연주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시고 특히 여름 야유공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정장을 하고 나가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송화강(Sungari River 승가리강) 한가운데’태양도’라는 섬이 있었다. 백계 러시아인들의 동화책 그림같이 아기자기한 자그마한 별장들이 흰 자작나무 사이에서 엿보이고 만주인들의 논밭 옥도에서 야채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겨울이 되어 무서운 추위가 오더라도 아버지가 쌍 말이 끄는 썰매마차에 온 식구를 태우고 낙타 털 담요 속에 쌓여 강 건너가는 나들이가 우리들의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름에는 오케스트라 음악인과 그 가족과 함께 모여 고기잡이를 나갔다. 남자 어른들이 그물을 배에 쌓아 싣고 배를 타고 나가 어른 손바닥만 한 생선이 그물 속에서 팔딱팔딱 뛰는 것들을 가지고 오면 부인들이 재빠르게 손질하여 일부는 매콤한 찌개를 끓이고 대부분은 햇볕에 말렸다. 나는 남동생과 함께 동네 야채 밭에서 탐스럽게 익어가는 호박이나 가지를 훔쳐 농부와 요란스럽게 짖는 개에게 쫓기며 도망치고 어른들에게 생선찌개 맛있게 하시라고 갖다 드렸다. 손질한 생선은 만주 대륙의 오후 따가운 햇볕에 말리면 저녁 녘에 돌아갈 때 쯤 되면 바싹 마르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 우리 집에는 Harbin Symphony Orchestra에 있는 한국 음악가들이 연주 후에 찾아오고 파티가 자주 있었다. 어머니는 여름에 말렸던 생선을 기름에 튀기고 각종의 러시아 소시지를 안주해서 대접하셨다. Vodka 술잔을 높이 들고 “스텐카 라진” 노래를 부르면서 페치카로 훈훈한 응접실에서 어른들이 취하면서 즐기는 것을 나는 잠도 안자고 훔쳐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미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우리들은 그 아저씨를 ‘키시모스키’라고 불렀다. 김인수라는 이름이 창시 개명으로 일본이름 기시모또가 돼 버렸다. 꼭 러시아인처럼 체구가 큼직하고 코가 크고 눈이 이글이글 한 얼굴이 마치 러시아인처럼 보여 우리들이 그런 이름으로 그 아저씨를 불렀다. 김인수는 오케스트라의 principal cellist 었다.

2살 위 나의 언니의 말에 의하면 부모님을 따라 Harbin Symphony Orchestra가Dvorak Symphony No.9 & From New World연주에 김인수가 첼로 독주하는 것을 들었다 고한다. 떠들썩거리는 손님 가운데는 검은 망토를 둘러 입은 창백한 패병환자 보꾸상이라는 젊은 바이어리니스트가 구석에 쪼그리고 함께 vodka 잔을 비우고 있었다. 러시아 소설의 비극 주인공 같은 그는 내 어린 소녀의 가슴에 미묘한 설렘을 느끼게 해줬다. 모든 조선 사람들이 창시 개명을 했는데 그 사람만이 보꾸상, 박 씨라는 이름을 간직했고 어른들이 쑤군대고 말하는 것을 엿들어보고 그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 고생하는 동안에 패병을 앓게 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그 보꾸상은 누구였을까? 우리는 그 시절의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목숨만 건저 살아남은 전재민 보따리 속에는 사진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하얼빈 교향악단은 1908에 러시아 음악인으로 구성된 세계적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 였고 한국 음악인들도 몆 명 있었고 우리나라 현대 음악계의 선구자 임원식(林元植 · 1919-2002)이 지휘자로 데뷔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39년 3월26일에 경성일보 초빙으로 연주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경성 시내는 크게 들썩거렸다고 한다.

1945년에 제2차 전쟁이 일본제국의 패전으로 끝나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다. 우리 식구도 빈손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와 하얼빈에서 친밀하게 지냈던 김인수는 서울에 돌아와 1945년 9월15일에 현재민을 중심으로 조직한 우리나라 광복 이후 최초의 민간 교향악단 고려교향악단(高麗交響樂團)의 회원으로 활약했다. 1946년 임원식이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그 뒤 재정난 때문에 고난이 많았고 임원식이 미국으로 떠난 후 김인수가 지휘자로 서나 소러이스트로서나 자기 재산을 써가며 운영을 이어갔으나 재정은 해결 못하고 1950년에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인계되었다.

그의 부인은 생계를 유지하기위해 명동에 ‘신세계’ 라는 다방을 경영했다. 폭음가였던 그는 명지휘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명동 어떤 술집에서 쓰러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Dvorak 의 ‘From New World Symphony’ 의 cello 독주를 수없이 들을 때마다 키시모스키와 vodka 파티의 장면이 기름에 튀긴 생선 냄새와 함께 내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고향 하얼빈의 이국적정서에 잠겨 저 먼 풍요로운 추억의 미로에서 내게 손짓하고 오는 것을 느껴본다.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