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 홍 건 (의대 64)
지난 4월 16일 부터 27일 까지 시카고 한인문화회관에서 “에티오피아: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리라” (시편 68:31) 라는 주제로 45점의 작품전을 개최한 홍 건 동문. 2013년에 그동안 몸담아 일을 하였던 바쁜 병원의 일에서 은퇴를 하고, 에티오피아로 5년간 선교활동을 떠났다. 그는 작은 강 마을에서 수백 명의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휴식 시간에 작은 스케치북에 그 곳의 사람들과 주변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애정이 담긴 그의 이야기와 그림을 특별인터뷰에서 만나본다. <편집자 주>
■ 미대가 아닌 의대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초등학교 때 이미 많은 미술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예술을 더 진지하게 추구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포기했다. 한국전쟁 직후 예술가가 한국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제가 미술에 종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종이 뒷면에 낙서를 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서울 의대에 진학했지만, 그것이 나의 그림에 대한 사랑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의예과 부터 본과 4년 모두 6년 동안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주말이면 미술부 방에서 함춘원을 내다 보면서 같이 그림을 그리고 매년 한번씩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
미술의 꿈을 접은 후 의대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고등학교때 병환으로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님을 돌보는 의사들에 대한 감사함과 호기심에 의대를 진학하게 되었다.
■ 미국에 오게 된 계기는
1970년 대에는 졸업을 하면 그냥 미국 가는 것이 유행이었고 뚜렷한 목적이라기 보다 잘살아 보겠다는 생각에 군의관 3년을 먼저 복무하고 무작정 도미를 하게 되었다. 월남전이 끝나면서 전쟁에 참전했던 젊은 미국의사들이 돌아오면서, 그동안 공백을 외국의사들이 메꾸어 레지덴트를 수월히 구할 수가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때는 미국의사들과 경쟁을 하면서 웬만한 좋은 병원에서 수련의 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특별히 에티오피아 선교와 에티오피아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는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을 돕기위해 16개국 UN 참전국중에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에티오피아군(본래 황실 친위대인 강뉴(Kangnew)부대(적을 초전에 격파한다는 뜻으로 6037명의 군인들이 참전하였고, 253번 전투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은 용맹한 부대)은 한국전에서 122명의 전사자와 560명의 부상자가 생겼지만 한명도 포로가 없었던 혈맹의 나라다. 이들을 돕기 위해 서울 명성교회에서 2004년에 명성병원 문을 열고 2012년에 의과대학을 세웠으며, 2015년에 그레이스 병동을 증축하였다. 그래서 은퇴하기 전 20여개 나라를 단기선교로 방문하여 물색을 하던 중 에티오피아 명성병원을 선택하게 되고, 은퇴 후 5년 동안 봉사하면서 환자를 돌보고 의과대학생들을 가르키면서 짬짬이 그림을 그렸다.
■ 에티오피아 선교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우리병원에서는 참전용사는 전액 무료, 부인은 50% 감면하여 모든 진료및 치료를 해주고 의과대학에서는 참전용사의 손자들에게 특혜를 주어 입학의 특전을 베풀고 장학금을 주어서 교육을 시켰다. 2018년, 내가 그곳을 떠나기 전 제 1회 의대 졸업식에 참석하여 의사가 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당시 참전 용사분들이 병원에 오게되면 꼭 내 방을 찾아와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어 작품을 준비했다.
한국전에서 돌아온 집이 없는 군인들에게 셀라시에 황제가 황실땅 중 일부를 하사하여 참전용사들이 정착하게 하였지만 많은 분들이 이미 작고하였고 또는 이사를 가서 실제로 그곳에 거주하는 분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촌(Korean Village)” 라고 불리고 있고 KOICA 등 기관에서 학교를 지어주었고 젊은 봉사자들이 와서 음악, 미술, 태권도 선생님들이 사역을 하였다.
에티오피아에는 80개 종족이 흩어져 사는데 각각 자기네 말을 사용한다. 한국에서 온 김명환 선교사님이 멀리 떨어진 마장 족속이 사는 시골에 가서 20년을 그 부족 말을 배우고 그 부족의 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인쇄된 성경을 봉헌하는 날 초대되어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10 시간 이상 버스로 찾아가 모든 부락 마을 주민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참석하여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그 지방 기타같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야외 집회 장소에 모여드는 광경을 스케치하고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일생 잊어 바릴 수없는 감격의 장면이다.
에티오피아는 농경을 주로 하는데 사람이 사는 뜨쿨이라는 초가집은 둥그런 모양에 높은 지붕이 가운데로 흙 바닥에 가운데 벽을 두고 사람과 소, 양, 염소등의 짐승이 반대편에 한지붕 아래에서 산다. 우리들이 이동진료를 나가서 2-3일을 지내면서 수도물과 전기는 물론 화장실이 없는 형편에 어렵지만 견디고 돌아 오는데,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의료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고 여러가지 풍토병과 전염병, 피부질환 그리고 안질들이 가난한 삶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와는 달리 최소한의 문명의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삶을 목격하면서 가슴이 아팠다.
■명성병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영상의학과 전문의사로서의 일을 하면서, 명성의과대학 의대생들이 실습을 나와서 교육도 하고 강의도 하였으며, 에티오피아에서 처음으로 Interventional Radiology (중재적 시술)을 도입하여 한국에서 여러 대학의 교수님들을 초청하여 5명의 에티오피아 젊은 영상의학과 의사들을 2년제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2018년 8월에 5명 졸업을 시켰다. 앞으로 본인들이 다음 세대들을 가르키도록 토대를 마련하고 돌아 올 수 있게 된 것이 흐뭇한 열매다. 그리고 매일 8시에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20분전에 소예배실에 모여서 현지인 직원들을 위하여 설교 말씀을 전하고, 주일에는 입원환자와 방문한 가족들을 위해 병원 로비에서 예배를 드리고, 영어로 설교하고 현지인 사역자가 통역을 하고, 예배가 끝나면 원하는 환자들에게 안수하고 기도를 해주는 기회가 있었다. 매년 부활절이 되면 목요일 아침 직원 예배때 처음에는 남자 직원, 그다음에는 여자 엑스레이과 기사, 그리고 병원 화장실 청소하는 여자, 마지막에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16살 짜리 바유쉬 라는 여자 환자를 세족을 하여 주었다. 발을 씻겨주는 나는 물론이고 모두 같이 울었고 은혜를 받았다. 하지만 종내 심장수술을 받지 못하고 병이 악화되어 제가 떠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 그림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 어떤 그림을 주로 그리는지
추상화를 보고 도전해 본 적도 있고 힘들 때 몇 번 시도하기도 했다. 다만 추상화로 전달될 수 있는 복합적인 메시지보다는 공통적으로 쉽게 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사실적인 그림에 더 애착이 가는 편이다.
■ 시카고 지역에서 여러 작품전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국에 있는 에티오피아 인들과의 인연도 그로인해 있을 것 같다.
고맙게도 많은 한국 지인들과 미국인들이 작품전에 방문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많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와서 친구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음악과 예술은 국제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 많은 시골 지역을 방문했다. 어떤 마을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기분이 상할 것이고 심지어 그들의 영혼이 그 사진의 불빛에 빼앗길까 봐 그것마저 싫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케치되는 것에는 게의치 않았고, 오히려 더 먼저 하겠다고 싸우기도 했다. 시카고 지역에 사는 에티오피아인들은 그들의 유산과 배경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아름답게 그려진 고향의 그림에서 고향의 모습과 사람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COVID-19로 인한 생활이 예술적인 측면에서 동기부여가 된 점이 있는지
전 세계의 많은 선교 병원들이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지만 Covid로 인해 불가능한 상황이다. 나는 지금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여 CT 분석을 돕고 있는데, 월라이타 지역의 소도 크리스천 병원이 그 중 하나이다.
또한 Zoom으로 컴퓨터 이미지를 이용하여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지난 10월에 인디애나주 미시간 시티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대부분 환자, 의사 등에 대한 주제였다.
■ 젊은 예술가들에 조언을 한마디 해 준다면
1960년대에 가난한 나라에서 미술을 포기하게 한 그때의 아버지의 말은 옳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에 도전해도 될 것이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찾을 권리가 있다. 한국은 현재 경제 강국인 만큼 좋은 예술가들 또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다. 하지만 성공의 결과와 상관없 이 여러분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동안 더 행복해질 것이다. 예술가, 음악가, 작가, 배우,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누군가에게 낙담하고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 서울대 동문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아직 은퇴를 하시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은퇴후에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해보시고 만일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해보고 싶으시다면 미리 그런 기관이나 프로그램에 참가를 해보시기를 권한다. 은퇴를 하고 나면 늦을 수가 있다. 건강과 여러가지 여건이 허락한다면 남을 위해 봉사를 하면 나에게 오는 감사와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직접 체험하여 느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