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성취, 커뮤니티 참여도 성공적인 삶: 최수용 대표 (상대 56)

철용 · 한용 형제 동문과 뉴욕동창회에 큰 힘 실어

최수용 동문은 무역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의 주역들을 배후에서 자문했던 대부이다. 리버티은행 이사장과 스토니브룩대 한국학과 설립위원 및 후원회장, 스토니브룩대 총장 자문위원 역임 등 커뮤니티 참여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한국정부가 대미 수출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던 60년대 말, 새프 가방 하나 들고 뉴욕에 떨어졌던 30대 초반의 주재원이 있었다. 바로 최수용(78세)이다. 그간 힘들고 고된 여정 끝에 이곳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고 흩날리는 백발의 모습으로 은퇴 길에 들어섰다. 한때 도미니카에 대형 봉제공장을 설립 운영하면서 80년대 초 적기에 부동산에 손을 댄 것이 주효하여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최수용 대표의 성공스토리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60년대 말 주재원…샘플가방 하나 들고 뉴욕 도착 무역과 부동산 투자 등으로 ‘아메리칸 드림’성취 리버티은행 창립 당시 이사장직, 합병까지 큰 활약 스토니브룩대 한국학과 설립위원, 후원회장 역임

동영상 제작, 웹사이트 운영은 물론, 컴퓨터 클래스까지 운영하신것으로 아는데… 파킨스씨병 투병 전까지는 언제나 나의 하루는 이른 새벽시간 컴퓨터를 켜면서 시작되었다. 컴퓨터를 벗삼아 지내곤 했다. 꼼꼼히 배운 실력으로 동영상을 이용해 작품 서너 개 만들어 웹 사이트에 올리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사진을 직접 찍어 거기에 음악과 글씨도 넣고 손질을 해서 친구한테 보내준다던가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전에는 막연하거나 얄팍하게 알던 지식을 컴퓨터를 통해 정확히 그리고 해박하게 알게되는 장점도 있어 좋았다.

뒤늦게 그걸 알아서 어디에 쓸 것인가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매주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잡아 1백 명은 되었었다. 애호가 수준은 이미 넘어섰고 전문가 수준의 반 정도 실력을 갖췄다. 내가 무료로 가르치는 컴퓨터 클래스가 두 군데나 됐었다. 내가 다니는 그레이트넥 성당 클래스는 주일 오전 미사가 끝나고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12시까지 2시간동안 열리는데 기초부터 시작한 강의는 4년 반 만에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또 뉴욕지구 서울대 동창회 노장파들의 모임인 골든 클럽 클래스도 운영했다. 이 강의에는 20여명이 랩탑을 들고 시간이 끝나도 가지 않고 좀 더 배우려고 북적였다. 나의 사색적인 성격에 딱 어울리는 노년의 봉사였다. 지금은 파킨슨병 때문에 그만두고 이후 처음부터 함께 가르치던 후배 양인회씨가 말아서 열심히 잘 이끌어갔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격언이 있다시피 나이든 동문들도 살아 움직이는 인터넷 세계에 들어와 활발하고 보람 있는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시길 바란다.

주재원으로 도미후 비즈니스로 성공하게 된 계기는?

1960년 서울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수출입 회사의 실무·중견 직원을 거쳐 69년 주재원으로 뉴욕에 상륙했을 때, 미국에 수출된 각 사의 한국 수출품에 문제가 많이 생겼다. 초기에 있었던 부조리이지만 악덕 수입업자들이 신용장에 함정을 만들어 놓고 상품이 도착할 때 클레임을 걸어 대금 지불을 거절하거나 단가를 깎는 등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경험을 통해 그런 케이스의 해결 방법을 터득한 그는 문제의 상품들을 지혜롭게 처리해 수출회사도 구하고 자칫 되돌아갈 뻔한 상품도 현지에서 적절한 판매처를 구해 주었다. 74년 뉴욕에서 클레임에 걸린 S사의 인조가죽 가방을 김혁규 · 최희용에게 판매 의뢰한 것이 히트를 쳐,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의 효시가 되었던 것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때 얻은 별명이 ‘유태인 킬러’, ‘브로드웨이 대부’ 였다. 2년 후 독립하면서 ‘로드웨이 엔터프라이즈’ 를 설립했다. 1225 브로드웨이 빌딩에 사무실을 차리고 19년간 남녀 의류 수입 및 수출로 연간 거래액 9백만달 라는 당시 신용조사기관 ‘던 앤드 브래드 스트릿’ 에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부동산 투자에 성공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나의 은퇴 시기는 15년 전, 젊은 시절 부동산에 투자했던 수입이 보장되니까 은퇴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친구처럼 정다운 소일꺼리 컴퓨터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의 부동산 투자는 198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 처음 퀸즈의 한 상가 건물을 76만 달러에 매입하면서 25만 달러를 다운페이 했다. 건물주 모기지 15년에 연 금리 80%로, 단층 상가 8개 스토어가 모여 있는 작은 규모의 상가였다. 공과금과 보험료를 잘냈더니 신용이 쌓여 바로 앞에 있는 건물도 매입할 수 있었다.

임대 수입이 증가하는 한편 건물가는 20년 사이 7-8배나 상승하는 등 당시 뉴욕의 부동산 과열현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현명한 투자였다고 생각됐을 무렵 80년대 후반부터 유동자본을 확보한 한인들이 서서히 부동산 매입에 나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몇 개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빌딩을 매입한 친구와 동료들이 관리를 부탁했다. 자신이 소유한 건물을 합쳐 총 13개 건물과 세입자 120명 이상을 관리 · ·운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세월을 보냈다. 어쨌든 부동산은 노후를 보장하는 효자 상품임에 틀림없었다.

리버티은행 창립에도 큰 역할을 하셨는데

1998년에는 뉴욕한인사회에서 엠파이어, BNB에 뒤이어 세번째로 창립된 리버티은행의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자본금 865만 불, 주주 12명에 행장은 대학 동기인 우상영이 앉았다. 개점 2년만인 2000년에 플러싱 지점이 설립되고 자산이 7,200만 달러로 예상보다 50% 초과 달성되는 발전을 이룬 가운데 8년 만에, LA에서 창설된 월셔은행과 합병하기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다양한 정치·사회활동을 펼치셨다.

1983년부터 10년 가까이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한국학과 설립위원과 후원회장으로 기부·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스토니 브룩대 총장 자문위원으로도 있었다. 지역 정치에도 참여, 1989-94년까지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의 아시안 자문위원으로 유은희 · 홍성육 등과 동참했다. 1997대 뉴욕지구 서울대 동창회장과 그레이트넥 한인천주교회 신자 회장을 역임했다.

3형제가 모두 서울대 동문으로 함께 뉴욕에 살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형제분들을 소개 해주신다면

우리 서울대 출신 동문 삼형제 중 내가 첫째이다. 첫째 동생 최철용(뉴욕지부 22대 회장역임)은 농경제학과 57학번으로 한국에서농협근무 1970년 미국이민, 현재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다. 둘째동생 최한용은 농경제학과 58학번으로 서울 신탁은행 국제영업부 차장을 지냈으며 1978년 미국 이민, 현재 CEO, Hansu Enterprises Inc. 부동산 임대업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모두 함께 미국으로 왔으며 지금까지도 차로 10분 거리에 거주하며 우애좋게 지내고 있다.

간단한 가족 소개를 부탁한다

가족으로는 이화여대 가정학과 출신으로 부인(김상림)과 슬하에 2녀1남을 두었다. 변호사로 일하는 장녀(기원)과 스피치 테라피스트인 차녀(기인), 그리고 Willkie Farr- Gallagher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는 아들(리차드)이 있다.

약 력

현재 – CEO, Kione Enterprises Inc & Subong Inc.

1998 Liberty Bank 이사장 1989-94 쿠오모 주지사 아시안 자문위원

1996-97 서울대 뉴욕 총동창회장

1973-2006 CEO, Loadway Enterprises Inc.

1969-72 부산제복 주식회사 뉴욕 지점장

1965-69 서광산업 무역부장 1960-64 유한양행 근무

1969-71 NYU Business School (Stern)

1960 서울 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55 충주 고등학교 졸업

 

● 2017년부터 한미 장학재단을 통해 해마다 경영대학원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 2003년 미주한인 인물 101인 선정 (미주한인 100년사 수록 명단)

● 2001년 서울대총동창회 공로상

● 2018년 서울대 총동창회 사회기여상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