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권: 그 때와 지금 징비록을 보고나서 _ 온기철 (의대 65)

임진왜란을 혼자 몸으로 해결하다시피하고도 시기심 많고 무능한 선조에게 당치도 않은 강화파로 몰려 파직 당한 영의정 유성룡은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기록이 담긴 징비록의 집필에 전념한다. “징비” 미리 징계라여 후환을 징계한다(예기 징이 비후환)는 뜻이다. 1592-1598까지 7년에 걸친 전쟁의 기록이다.

지혜롭지 못한 왕과 국익보다 붕당의 이익을 중시하는 조정대신들은 왜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의 손실, 피폐한 국토와 비참한 백성들의 생활상을 회고하면서, 자손들은 이러한 실책을 범하지 말라고 반성의 기록으로 징비록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 징비록을 기초로 하여 만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관한 대하드라마 “징비록” 이 KBS에서 50회동안 방영되어 아주 흥미롭게 보면서 당시의 상황이 요즈음 논쟁의 대상이 되고있는 미군 작전권 문제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징후가 여기저기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준비를 게을리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처 의주까지 도망쳐 버린다. 급기야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이 오게되는데, 이들은 오자마자 조선군의 작전권 포기를 요구한다. 선조와 신하들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으나, 명은 조선의 종주국이므로 이 전쟁은 명과 일본의 싸움이지 조선과 일본의 싸움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안들어 주면 철군하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조선은 명에게 작전권을 넘겨준다. 이후에 명군은 조선이 싸워달라고 할때 싸워주지도 않고 저희들 멋대로 조선이 강력히 반대하는 일본과 강화희담을 하게 된다. 비밀리에 명은 일본이 조선에서 철수하면 하삼도(경상, 전라, 충청도)를 일본에 양도할 것을 강화 조건으로 회담을 진행하면서 이를 조선에 알려주지 않는다. 7년동안 조선군은 총공격의 시기를 정보 수집을 통해서, 정하고 명군에게 싸울 것을 요구하나 이를 거부하기 일수고 공격하지 말아야 할때 함으로써 아군의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되던 해로부터 358년 후인 1950년 6월25일 북한은 남한을 침공한다. 전쟁 발발 17일후,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전쟁수행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 맥아더 장군에게 작전권을 맏아달라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대한민국군 적전 통제권은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어 가게 된다. 미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을 겸하게 되어 있어서 사실상 한국군은 미군 지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초기에는 미군이 한국군 지휘본부에 명령을 하달하는 형식으로 지휘체계를 갖추었으나, 10개월후, 한국군 3군단의 참패로 한국군의 임무는 작전을 재외한 인사와 행정, 군사훈련에만 국한되었다. 그로부터 40년후, 노태우 대통령은 작전권 회수를 공약하고 당선되어 임기중 미국으로  부터 이의 회수를 약속받는다. 이후 김영삼 정권때 평시 작전권을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로 환수한다.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몹시 기뻐했으며, 모든 보수언론들은 이를 환영했을 뿐만아니라 전시작전권의 환수를 촉구했다. 예를들면 조선일보는 1994년 12월1일 사설에서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전시작전권통제권까지 환수하는 것이 다음의 과제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2012년에 전시 작전권 회수를 미국으로부터 약속받는다. 이를 추진하는 동안 김영삼 대통령때 이를 촉구했던 보수 언론들은 이를 맹렬히 반대한다. 2006년 8월10일 자 중앙일보는 “작전권 환수를 주권으로 보는건 잘못”, 동아일보는 “전시작전권에 관한 대통령의 방기와 모험주의”라고 보도 한다. 평시 작전권 회수를 했던 장본인인 김영삼 대통령까지도  반대성명을 한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2015년으로 연기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무기한 연기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고 한다.

1590년 임진왜란 발발 2년전에, 서인 황윤길을 통신사로,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그리고 서인 허성을 서장관으로 일본에 파견하여 풍신수길의 침략의도를 파악하도록한다. 그러나 서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정은 침략할 것이 확실하다 했고 동인 김성일은 전쟁위험이 없다고 보고한다. 선조는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쪽에 치우치는 정책을 채택하여 전쟁 준비를 게을리하게 된다. 왕권사회에서는 군주의 선택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나, 근현대의 시민사회에서는 국민의 선택이 국가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국민이 올바른 판단을 하게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그런데, 한국의 언론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고 마치 350여년전에 나라의 장래는 뒷전이고, 붕당의 이익 만을 위한 보고를 했듯이 자기 성향 정당의 정책에 따라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를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징비록은 약소국가의 작전권이 원군으로 온 강대국의 손에 있을 떄, 자국의 의견이 얼마나 무시 당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6.25당시의 한국군과 미군의 관계를 300 여년전 명과 조선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많은 공통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맥아더가 38선을 넘고, 중공군이 개입하자 쏘련의 명에 의해서 작전권을 중공군에게 넘겨준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은 명실공이 중국과 미국의 전쟁으로 된다. 명은 당시의 전쟁이 조선과 일본이 아니고 명과 일본이 싸우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전쟁의 휴전협정은 중국, 북한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미군 사령관)이 서명한 협정이며 이에 남한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정에 반대했으나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에게 전적으로 전쟁을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이 전쟁을 하지않기로 한이상 한국이 혼자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미국과 중국의 전쟁 종결점은 원상복귀에 있었으나 남한의 그것은 북한을 섬멸하여 통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전쟁을 그만두기를 원하지 않았던것이다. 명이 조선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강화 조약을 맺으려한 점 또한 역사의 반복처럼 느껴진다.

징비록에 담겨진 임진왜란과 현대에 겪었던 6.25는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국방을 맏기면 어떠한지 잘보여 주고 있다. 제대로 된 자주독립국가는 그 국방을 외국군대에게 맏기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힘이 부족하면 할 수 없이 강대국에 의지하게 된다. 작전권을 회수하기 전에 꼭 물어할 질문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있는가?” 이다. 이힘은 꼭 강대국보다 강한 힘이 아니라, 그들에게, 건들면, 상당한 피해를 줄 정도의 방위력을 보여 줌으로써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면 된다.

거의 6년만에 유성룡은 징비록의 집필을 마친다. 잘 읽어 보고 외침에 대비하라고 간곡히 부탁했것만 그로부터 32년후 청으로부터 외침을 당한다. 이를 병자호란이라했다. 조선왕 인조가 누루하찌의 아들 홍타이지에게 땅에 머리가 닫도록 사죄하는 수모를 당한다. 국익보다 붕당의 이익만 앞세운 결과이다. 유성룡의 혼이 징비록을 통해서 우리를 살피고 있다. 작전권의 환수는 당리당략보다 국익을 생각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잘 살펴봄으로서, 그 때의 잘못이 오늘의 채칙이 되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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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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