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완 (공대 57)
“애들아 아버지 먼저 출발 하셨다.”
두 아들과 딸 그리고 젖먹이 막내딸을 등에 업은 순옥이는 칭얼대는 아이들을 달래었다. 만주땅 중앙에 있는 하얼빈 시에서 사는 동안 2차대전은 갑자기 끝났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미국의 원자탄이 일본에 투하되며 일본은 항복하고 말았다. 며칠 후에 애들 아버지 최갑수는 단둥시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먼저 떠났다. 애들 엄마 순옥이는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이웃집에 팔고 금 조각들을 사서 아이들의 외투 속에 감추어 꽤 매웠다. 두 아들은 앞에 걷고 딸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등에 업은 두 살배기 딸 다섯 사람은 열차에 올라 단동으로 떠났다. 만주에 살던 모든 한국 사람은 한국의 신의주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단둥역 앞에 광장에서 아버지와 재회하였다.
압록강은 소련군이 국경을 봉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갑수는 압록강 건너는 나룻배를 찾아서 교섭하였다. 안개 낀 새벽 어두움 속에 여섯 식구는 배에 엎드려 천막을 위에 덮었다. 짐을 실어 나르는 모습으로 위장하였다. 배가 강 중앙에 이를 무렵 소련군의 기관총 소리가 따콩딱콩 들리기 시작하였다. 총알이 머리 위로 지나는 소리, 총알이 물에 튀는 소리가 빈번했다. 갑수와 순옥이는 가끔 하늘을 올려보며 기도만 하고 있었다. 배가 신의주에 접근하며 총소리는 잠잠해졌다. 삼엄한 국경선을 넘어 신의주 여관에 들어 여섯 식구는 드디어 안심하는 듯 했다.
다음날 가족은 기차에 몸을 실어 평양으로 향해 움직였다. 평양역 광장은 조용했다. 부근에 학교광장이 있고 다음 날 아침 소련군과 북한군 사이에 축구시합을 개최하고 있었다. 가족이 여관에 머무는 동안에 용성, 용완, 신자는 축구 구경을 하러갔다. 소련군과 북한군 사이에 경합이였다. 응원하는 열기 중에 누군가 신자를 넘어지게 하고 신자는 소리내어 울었다. 어디선가 소련 헌병이 달려와서 신자를 울린 북한 청년의 뺨을 때렸다. 용완이는 한국사람을 함부로 다루는 소련군에 화가났고 소리지르며 대들고 싶었지만 어린 나이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가족은 개성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발을 딛일 곳 업는 초만원이었고 기차 꼭대기 위에도 사람들이 올라앉아있었다. 열차가 달리는 중에 누군가 하얀 보자기를 창밖으로 던졌고 아기엄마의 외쳐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죽은 아기를 안고 울기만 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사람들이 죽은 아기를 빼앗아 창 밖으로 버린 일 이었다. 기차는 혼신을 다해서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기차는 가던길에서 멈춰섰다. 철길이 끊겨 있었다. 그곳에서 개성까지는 며칠을 걸어야 했다. 아버지는 다시 큰짐을 등에 매고 형과 나는 외투를 입고 앞을 걸었고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젖먹이를 등에 업고 뒤를 따랐다. 하루 종일 걷고 해지면 남의집 처마 밑에서 밤을 세웠다. 하루 종일 걷고 다음날 다시 걷기를 거듭했다.
개성에 도착한 즉시 가족은 삼팔선을 넘는 길을 물어 찾아갔다. 개성 남쪽으로 흐르는 임진강이 남과 북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우리 일행은 인민군 경비군에 체포되었다. 부모님은 우리 일행을 다시 돌려보내는 추럭에 테울까봐 걱정스런 눈빛이었다. 구치소에서 하룻밤은 뜬눈으로 세웠다. 어머니는 가족과 고향찾아가는 난민임을 이야기하고 경비군 장교에게 어머니 손가락에 금반지를 빼주는 듯 했다.
장교는 우리가족을 인솔하고 골짜기를 내려갔다. 계곡에 강을 건너는 다리를 가리키며 잘가라는 손짓을 하고 떠났다. 계곡의 다리 건너편에 남조선 경비병들이 보였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걸어 넘었다. 한국군과 미군이 섞인 경비대는 우리를 반기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얀 방역가루(DDT)를 뿌려서 우리 가족은 모두 눈사람이되었다. 아버지와 어며니는 눈사람 된채 처음으로 웃어보였다.
만주에 살던 때 순천에 사시는 할아버지(최양섭)가 다녀가셨다. 할아버지는 개성에서 우리가족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경비군의 연락으로 할아버지와 다시 만났다. 열차는 개성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순천까지 우리가족을 무사히 옮겨주었다. 하지만 8월 중순에 만주에서 떠나 2달 후에 고향 순천에 도착했을 때 2 살배기 막내는 엄마 등에서 고생 끝에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기쁨과 슬픔이 겹친 귀향길을 마치었다.
순천 할아버지 댁은 바쁜 큰길 위에 높은 석축을 쌓고 그위에 지은 큰집이었다. 계단을 올라 정원에 들면 감나무가 있고 현관은 현대식으로 지었다.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일본을 오가며 순천에서 처음으로 백화점을 차려서 운영하는 때 지은 집이다. 용완이는 이곳 할아버지 댁에서 출생하였고 자라는 동안 할아버지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미국에서 건축사무실을 운영하는 동안 어렸을 때 본 할아버지 사업하는 모습을 자주 기억했다.
길건너에는 순천의 갑부 성씨의 저택이 있었다. 순천의 가을 하늘은 맑고 여수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우리가 어렸을 때 추억을 돌려주었기에 고향은 평안하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