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예쁜 차돌을 연상케 하는 하기환(공대 66) 박사님은 L.A. 한인 커뮤니티를 이끌어 오신 비즈니스에 성공한 재력가로 우리 동문인 것이 자랑스럽다. 누구나 바라고 이민 오는 아메리칸 드림을 하기환 박사님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견디며, 닥터이신 아버님의 엄한 교육에서 그 곧곧한 의리를 모토로 KS마크라는 엘리트의 자만심에서 벗어나 명석함과 폭넓은 인간 관계로 자기의 보람된 삶을 이루었다. 몇 년간의 인터뷰 사양에서 이번에 허락된 인터뷰 질문에 “어휴 너무 어렵다“ 하실 때 정말 그 어려운 일들을 해낸 마음의 거인이 하시는 말씀에 순수함이 엿보인다.
글: 조직국장 백옥자
1. 미국에 오신 이유
1970년 유학생으로 University of Wisconsin 전기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는 유학생시험을 통과해야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Wisconsin 대학에서 M.S. Degree를 받고 73년에 UCLA 로 와서 Ph. D. Degree를 77년에 받았습니다.
2. 유학시절의 어려웠던 점과 기억에 남는 추억
뭐니 뭐니 해도 경제적 어려움이겠죠. 학교에서 Research Assistant 로 일하면서 300불 정도 받아 근근이 생활했습니다. 그 당시 Gas 값이 Gallon 당 29¢ 였죠. 일주일에 $20 이상은 식비로 쓸 수가 없었어요 학교에서 주는 텃밭이 있었는데 농과대학 출신은 배추, 무를 심어 김장까지 하는데 우리는(나와 Wife) 잘 자라는 깻잎만 심어 먹었죠. UCLA 에 와서는 아기도 생기고 Teaching Assistant 로 일하고 Wife가 부업을 하며 근근히 살았습니다. UCLA Married Apt 가 405 Freeway 바로 옆에 있어서 정신병 걸릴 정도로 소음과 싸움을 했습니다. 낮에도 소음을 막으려고 창문에 담요를 쳐놓아 밤처럼 캄캄하게 살았죠. 지금은 방음이 잘된 새 건물이 생겼더군요.
3. L.A. 한인사회를 위해서 봉사하신 일들과 성취된 일들
1992년 4.29 LA 폭동 때 제가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있었고 또 그 당시 한인회장이 부재중이라 제가 대책위원장을 맡아 일했습니다. 총까지 차고 다니면서 한인타운 수비에 앞장섰습니다. 폭동 후, 성금으로 걷은 기금 문제로 타운이 서로 싸우고 반목이 커져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2000년부터 4년간 한인회장 하면서 제일 추억에 남는 일은 World Cup 응원이죠. 그 당시 한인타운 지역 시의원이었던 Nate Holden 씨와 협상하여 그 때 새로 지은 경기장 Staple Center 를 1달러에 빌려서 열렬한 단체응원을 펼쳤습니다. 2만 명이 새벽에 모였죠. 그 이벤트가 비로소 한인회가 미주류 사회에서 인정받는 한인단체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Dr. 하기환 회장님은 한미 정계 인사들과 친밀한 유대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Doctor Kee Whan Ha Square 의 보상 및 한인상공회의소 2번의 재임과 L.A. 한인회장 2번을 하신 그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4. 삶의 목적과 앞으로의 계획
하루하루를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또한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바쁜 중에서도 일 년에 1/3 정도는 여행을 하며 머리를 식히고 산 인생 공부를 많이합니다. 나이 70이 됐지만 아직 Retire 는 생각해보지 않았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지금하고 있는 Business 와 기회가 주어지는 한 Town 봉사를 계속 할 계획입니다.
5. 비즈니스 성공담
1970년 말에 UCLA 에서 Ph. D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서울 공대 교수직까지 확보했는데 Hughes Aircraft 회사에서 Job Offer 가 오는 바람에 미국에서 경험을 좀 쌓고 한국으로 갈려고 Hughes Aircraft 에 입사했습니다. 막상 입사해서 일을 해 보니 그 회사에서 처음 시작된 Project 라 안 맞았습니다. 그런데 부동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회사 동료가 얘기가 됐습니다. 흥미롭더라고요. 집에와서 회사 그만두고 부동산하면 어떨까하고 Wife 한테 얘기했더니 Wife가 펄쩍 뛰었어요. 고생고생해서 Ph. D 까지 따 놓고 부동산이냐구요. 그런데 몇 일후 Wife가 사람이 한번 사는 세상인데 하고 싶은 일하고 사는게 맞는것 같다고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부동산업이 안 맞으면 다시 회사로 갈 수 있도록 회사에 Leave of Absence 6개월을 받고 Business 파는 부동산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 이민 붐이 불어 미국에 와서 Business 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 Business 를 많이 팔았습니다. 돈이 조금 모이면 한인 타운에 있는 집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부동산 사무실을 열고 부동산, 건축사업을 하며 운이 좋아 많은 도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92년 폭동으로 부동산 경기 하락, 지하철공사 등으로 Wilshire 가의 고층 오피스 건물 및 아파트 등, 그 동안 이루어 놓은 것들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88년에 우연히 시작한 한남체인이 있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그맣게 시작한 한남체인이 그 후 주요 Business 로 성장하여 다시 부동산 투자를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부동산이 공개 자료만으로 평가해도 1억 달러가 넘을 정도라고 평한다. 400만 불에 매입한 윌셔 갤러리아가 5천만 달러 매각, 6가와 알렉산드리아 체프만 프라자, 라스베가스 골프장 외 20여 곳의 부동산 재벌이 되신 것은 이민 초기의 Mrs. 하의 타파웨어를 들고 남의 대문을 두드린 눈물어린 고생스러운 숨은 내조의 덕분이 아닐까?
6.가족관계 (아내를 만난 사연/ 자녀근황)
67년에 서울 공대와 이대 불문과 미팅에서 만나 5년이나 Date 하다가 71년에 미국 Wisconsin에서 결혼했습니다. 결혼 비용은 $100 들었습니다. 피검사(그 당시 결혼하려면 피검사부터 했습니다). 목사님 주례비, 케잌 등 친구한테 사진을 부탁했는데 잘못해서 우리는 결혼 사진이 없습니다. 딸 둘을 두었어요. 모두 결혼하고 또 손녀딸만 3명 있습니다. 큰딸은 변호사로 활동하다 애기 두 명 낳은 후 그만두고 지금은 Bank of Hope에 이사로 일하고 있고 둘째 딸은 아버지 사업을 돕고 있습니다.
7. 서울대 미주동창회에 바라고 싶은 점
동문들의 열성으로 신문, 피크닉 등 많은 Event 를 즐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동문간의 친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바라며 수고하시는 여러 동문께 감사드립니다.
8. 서울대 후배동문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사회의 고정관념에 이끌리지 말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열심히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러면 삶이 행복해 집니다. 서울대 나오면 모든 사람들이 Elite 로 보고 대우해 줍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 보면 서울대 보다 인간적이고 본인 희생을 감수하고 남을 도우면서 회사 일을 키워 나가는 것을 봅니다. 대학 들어 갈 때 최고의 학교에 들어 간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학 졸업 후 그 자부심 때문에 주변의 동료 및 경쟁 위치에 있는 직원들과 화합을 못하고 도움을 못 받고 외톨이가 되어 서울대생으로 기대하는 성취를 못하는 것을 봅니다. 서울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더 폭 넓은 교류와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9.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계신 명언이 있다면
특별한 명언은 없고 제가 가장 중요 시 여기는 것은 의리가 있는 사람을 아주 중요 시 합니다. 본인이 손해가 나는 것을 알고도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과 의리가 있는 사람들과 만나며 인생을 즐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제 자신이 항상 많은 부탁을 받고 사는 사람이라 힘들지만 거절을 할 것은 하고 일단 약속을 했으면 꼭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10. 바람직한 미주 한인사회의 미래상은
1세대와 1.5세대 2세대가 모두 아울러서 멋있는 한인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바랍니다. 최근에 벌어진 Homeless Shelter에서 보여준 편협성을 보면서 우리가 민족으로 미국사회에서 성공은 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인간적으로 우리만 편하고 잘살고 주변의 타 민족 및 소외된 계층의 사람을 무시하는 것에 반성을 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동안 한인사회에서 교계를 중심으로 엘에이 다운타운 Homeless에 사랑의 점퍼, 담요, 텐트 등 무수한 도움의 손길을 준 한인이 막상 자기들 주변에 Homeless Shelter 들어오는 것에 대한 광적인 반대 운동 등 주류사회 및 타 민족이 보는 한인사회의 이율배반적인 반응에 많은 실망을 느낍니다. 65명 수용하는 Shelter 반대를 위해 15,000불씩 드려서 LA Times 전면광고 등 과격한 반대는 한인사회가 Nimby의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 매김을 할 때 앞으로 제2의 폭동이 혹시라도 나게 되면 주변의 타민족 및 주류사회에서 당연히 받아야 할 Protection을 못 받고 92년도 폭동처럼 한인사회만 Target이 되어 큰 손해가 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