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가 일어난지 61년이 지났다. 4.19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많이 기술되어 있으니 내가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가 겪은 4.19.
1960년 4월 19일 나는 서울의대 졸업반 이였고 임상 실습중이었다. 그 전날 4월 18일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대적인 데모를 벌렸다. 실습중이던 나는 고려대학이 거리에 나와 싸우는데 서울대는 뭐하는가 하는 수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서울 곳곳에서 데모가 일어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가운을 벗어 던지고 대학병원을 나와 종로로 향했다.
거리는 데모대로 꽉 차 있었다. 종로에서 우로 돌아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 종로와 광화문이 마주치는데 도달했다. 거기서 데모대는 왼쪽으로 돌아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파와 우로 돌아 중앙청으로 향하는 두 파로 갈라졌다. 나는 모든 게 이승만 탓이니 그가 있는 경무대(경무대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뀐 것은 4.19후 유보선 대통령 때다)로 가 그와 따지는게 마땅하다고 여기고 이 길을 택했다. 중앙청에서 좌로 돌아가다가 다시 우로 돌아 북쪽으로 향했다. 이때 군중이 잡아탄 전차가 경무대로 가는 앞장을 섰다. 북으로 향하던 군중은 다시 우로 돌아 경무대 쪽으로 향했다. 나도 거기에 끼어 경무대 정문을 바라보고 가던 중 갑자기 콩 볶듯 하는 소리가 나더니 나보다 앞에 가던 사람들이 쓰러졌다.
나는 얼 떨떨 해서 우물거리는 찰라 내 바른쪽 무릎이 따끔해 지면서 나도 모르게 쓰러졌다. 경무대로 향하던 군중들이 뒤로 돌아서 달아나다가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두사람이 내 양쪽 팔을 어깨에 메고 민가로 들어갔다. 집주인이 놀란 눈으로 자기집 마당으로 들어오는 나를 쳐다보자 나는 한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신문에서 자주 보든 법무부 장관 李仁 이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택시를 잡아왔다. 그 택시를 타고 대학 병원에 도착했다.
X-ray 실에 가 다리 사진을 찍고는 즉시 수술실로 옮겨졌다. 한참 있다가 담당 의사가 와서 “수술은 할 필요가 없으니 병실로 옮기라” 하고는 총알이 관절 사이로 지나가 무릎이 어떻게 될지 관찰해야겠다고 하면서 X-ray를 들고 나갔다.
그러는 동안 내 동기생들은 실습하던 하얀 가운을 그대로 입고 단가를 들고 데모 부상자를 날라오고 이 사진이 크게 신문에 보도되었다. 내가 총상을 당하고 병실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은 동기생들이 내 방에 몰려왔다.
내가 입원한지 며칠 째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간호원장이 병실을 돌아다니며 “이승만 대통령”이 부상자를 “위문” 하러 오니 “준비”하라고 말하고 나갔다. 여러사람이 복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잔뜩 할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신 물러나시오!” 그런데 이승만은 나타나지 않고 다시 병동이 조용해졌다. 몇명이나 부상자를 “위로”하고 갔는지는 모르나 내 방에는 들리지 않고 사라졌다.
“이런 죽일놈이—-”하는 욕이 튀어나왔다.
총부리를 쥐고 있는 군인들을 향해 “우리 형님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마세요!” 하고 국민학교 꼬마들이 울부짖었다.
이승만은 여러 날 물러나라는 국민의 요구에 “내가 물러나면 혼란이 오고 그 틈을 타 북한 공산주의자가 쳐들어오니 물러날 수 없다”고 하면서 버티드니 미국대사 John Muccio가 경무대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날 “국민이 원한다면—-”하는 말을 남기고 미군 군용기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그가 지나가는 길가에 줄을 섰던 여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내 병실에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 서울대 교환교수로 와 있던
Glenn D. Paige도 그중의 하나였다.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 박사 말고 누가 있소. 뭐니뭐니 해도 이승만 박사 밖에는” 하고 열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4.19 보상금인가 뭔가 하는 것도 왔다. 나는 전부 사상계에 기부했다. 대학교 학생 “지도자” 중에는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 그리고 시민은 제 자리로 돌아갔다. 심지어 거리 청소까지 말끔히 하고는.
■당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4.19세대
4.19는 전국민이 참가해서 이룬 혁명이다. 코 흘리는 국민학교 학생으로 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이 참가했다. 그러나 그 중심 역할을 담당했던 층은 대학교 학생이었다. 이때 “기성세대”는 물러가라고 외친게 대학생이었다.
금년이 4.19가 일어난 지 61년이 되니 지금 80세를 넘어 85세를 바라보는 층이 4.19 세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보다 젊은 세대는 4.19에 주역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더 나이가 많았던 세대는 그야말로 “기성세대”로 지탄받는 세대, 살아남기 위해 현실에 타협하고 살던 사람들이라 중요역할 할 처지가 못되었다. 사회 중요인물들 다수가 친일파 민족 반역자였다.
대학생 중에서도 고등교육을 거의 마쳤으나 아직 생활전선에 들어가지 않은 상급반 학생이 4.19의 주축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세상
1945년 나는 B-29가 날아다니는 서울을 피해 김포 시골 친척집에서 10리 떨어진 학교에 걸어 다니며 공부하고 있었다. 일제 시대라 모든 교과서는 물론 선생도 일본말로만 가르쳤다. 내 이름도 이회백이 아닌 아리마 가이햐꾸였다. 또 나는 내가 일본사람과는 다른 민족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8월 15일 학교를 마치고 묵고 있던 친척 집에 와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아니 막강한 일본이 지다니 말이 되느냐”고 믿지 않았다. 매일 일본이 승리한다는 뉴스만 듣던 나는 완전히 세뇌가 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안전한” 서울로 돌아왔다. 일본말만 하라는 세상에서 일본말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 변화에 충실히 복종했다. 한글을 배우고 한국말만 했으며 이름도 이회백으로 다시 바꿨다.
1947년이 되자 중학교 입학 시험을 보게 되었다. 만원 전차에 매달려서 간신히 제시간에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학질을 앓고 있어 하루 걸러 나타나는 열이 마침 그날이라 떨면서 시험을 쳤다.
1950년 5년제 중학교가 중 고등학교로 분리되면서 나는 고등학교 일년생이 되었다. 그리고 밴드부에 들어 크라리넷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의 탱크가 마포 강변에 나타나 내 나이밖에 안되 보이는 어린 인민군 탱크병도 구경했다. 며칠 후 마포 형무소에서 죄수가 석방돼 좋다고 날뛰는 장면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학교가 문을 닫아서 놀다가 하루는 심심해서 학교에 갔다. 강당에서 인민군 모집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를
꼬마라고 여겼는지 내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 밤에 흑인미군이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것을 창문사이로 관찰했다. 9.28 수복이 되자 다시 학교를 기웃거렸다. 강당에 날카롭게 생긴 자가 “사상 검증”을 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너 공산 치하 때 뭐 했어!”.
“저는 밴드부….”
“어, 너 김일성 노래 배웠겠군 한번 불러봐!” 하고 욱박을 지르더니 꼬마 가지고 노는 게 싱거웠는지 “가!” 하기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다시 1.4후퇴로 인해 우리집도 남쪽으로 향했는데 둘로 갈라져 내려오다가 할머니, 어머니, 막내 두 동생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실신한 아버지를 대신해 장사로 거진 4년동안 학교를 쉬었다가 다시 공부 시작한지 1년반만에 고등학교를 수료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4.19세대가 다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았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공통분모를 가지고 자랐다고는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1)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녀 일본 교육을 받고 자랐다.
2) 해방 후 한국인으로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3)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혼란기를 거쳤다.
4) 한국전쟁 중에는 이북 공산주의와 이남 민주주의의 틈에서 고초를 겪었다.
5) 한국전이 휴전상태로 장기간 계속되면서 이런 상태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의 부정부패와 인권탄압을 보면서 자랐다.
이러한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의 부조리를 목격하고 자란 4.19 세대는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자라 생활전선에 들어가 현실과 타협하는 현실주의자가 되기전에 이상주의자로 남아 있을 때 4.19가 터져 자연스럽게 그리고 “우연히” 4.19의 기수 노릇을 하게 된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