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도에 나의 첫 유학지인 Glasgow(Scotland)를 미수 생일 기념으로 세 아들과 함께 60년 만에 돌아보았다.
나는 2013 년부터, 이루고 싶은 소망이 몇 가지 있었다(Bucket list). 그중 하나가 나의 기계공학도로서의 삶의 궤적에 전개된 첫 행운이었던 유학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Glasgow에 소재한 Royal College of Science &Technology (현 Strathclyde University) 대학원을 돌아보고 이방인 유학생을 가족처럼 대해주던 하숙집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이 유학은 그 당시 우리 경제사정으로는 자비 유학은 꿈꾸기 어려웠던 때, 마침 1년간(1957-1958) British Council Scholarship으로 유학한 곳이다. 모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통에 재학 중 군복무를 마치고 졸업한 후 부산에서 대한조선공사에 기수로 일하다 부산 수산대학교에서 선박기관학과 기계설계학의 강사를 겸하였다. 매일 모두가 생계를 위한 생업을 찾아 헤매던 때에 한국전 참전군의 일원이었던 영국이 주는 장학금이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처음엔 아내와 둘이서 하는 여행 계획을 세웠으나 몇 가지 문제가 예상되었다. 무엇보다 근 60 년 만에 방문하는 이 나라는 좌측통행을 하는 곳이라, 우리 둘만 갔다 가는 Taxi를 타고 공항에서부터 모교만 갔다 올 수밖에 없을 것이고, 더욱이 당시의 하숙집인 Campbell 가를 방문하여,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George Campbell Jr. 를 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내 아들 3형제에게 “아들 3형제와 나의 4 인조 스코틀랜드 여행 ”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영국 전체의 여행을 생각 했었으나, 각자 가정이 있고, 일에 바쁜 아들들의 사정을 감안하여 스코틀랜드 여행을 1 주일로 단축시켰다 (2017 년 1월 22일부터 28일까지). 마침 그 해가 나의 미수(米壽)의 해라 60년만에 다시 찾는 모교 그리고 내가 묵었던 정든 하숙집 Campbell 댁을 방문하는 꿈을 그리며, 이날을 기다렸다.
출발 전날 Seattle에 살고 있는 맏아들 Chris, Evanston에 살고 있는 둘째 아들 Ed, 그리고
San Diego에 살고 있는 막내 아들 Rich의 3형제는 서로 연락하여 Chris와 Rich는 출발 하루 전 시카고에 와서, Ed 집에서 유숙한 다음날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3형제의 계획에 따라 가고 있었기에 아무 편안히 집을 떠날 수 있었다. O’Hare 공항에 도착하자 바로 UAL의 Business lounge로 갔다. 이는 아들 3 형제가, 미리 나를 집에서 다시 집으로 올때까지 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Business 왕복 항공권 뿐만 아니라 모든 경비를 분담하기로 오래전에 세운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아들 3형제와 함께 시카고를 출발 Newark International Airport에서 갈아타고 Glasgow에 가게 되어 있었으나, 우리 항공기가 Newark에 몇 시간 연착한 탓에 Newark에서 하루를 지체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들 셋과 의논 끝에, 이 기회에 Manhattan을 둘러보기로 했다. 2001년 9월 11일 New York의 Twin-Building에 al-Qaeda 폭력배들이 음모하여, 이들이 American Airline의 항공기를 납치하여 조종하여, 동승한 승객과 Twin-Building에 충돌한 세기의 비극인 9.11테러 사건의 희생자 1977 명을 추모하는 Nightfall 9.11 기념 박물관, 그리고 새로 건축된 One World Trade Observatory까지 관람하는 뜻있는 시간을 가졌다. 만일 항공기가 Newark에 예정했던 대로 도착하였었으면, 이 귀중한 경험을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성령님의 인도로, 이루어진 나의 이 작은 소망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Glasgow(Paisley-Abbotsinch)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고, 대여한 자동차로
시내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운전한 맡아들 Chris는 옛날에 다니던 직장의 구라파 지사장으로 London교외에서 3년간 근무한 바 있고, 둘째 아들 Ed도 London의 Culinary school internship을 마치는 동안, 영국에서 산 경험으로 영국에서 운전하는데 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후에 보니 막내 아들 Rich도 아무 문제없이 운전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믿음직한 세 운전 기사가 있었기에 나는 시종 뒷 자리 오른 쪽에 앉아 옛 추억을 회상하며 여행을 계속했다.
■ George Campbell Jr. 를 찾아서
Glasgow의 숙소에 도착 후, 우리는 옛 하숙집 Campbell 댁을 찾아 나섰다. Mr. & Mrs. Campbell은 이미 작고했겠지만 4남매 중 외아들인 George Campbell Jr.는 당시 중학생이었으니 지금은 70 대 중반인 노인 일 것으로 짐작했다. 영국은 당시 가옥을 대대로 물려가며 사는 것은 보았던 터라, 그가 아직 그 집에 살고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옛날 1년간 머무는 동안 매일 모든 가족과 아침, 저녁 식사를 큰 식탁에 앉아 함께 하며, 한 식구처럼 살던 그 날을 회상하며 그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주소는 “17 Kelvin” 이었으나, 아들들의 조사에 의하면 Kelvin으로 시작되는 길은 여러 곳에 있었다. 여하간 우리는 Kelvin으로 시작되는 여러 곳을 다녔다. 드디어 어떤 집을 찾았다. 즉 앞에 흐르는 개천이 있었고, 개천 양측은 나무로 무성했다. 그 집 뒤에는 바로 갓파른 언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때와 판이하게 다른 점은, 집 왼쪽으로 5번 째의 집에서 길은 없어졌고, 바로 거기에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는데 그것도 없었고, 계속해서 언덕 아래로 길과 주택이 있었다. 그래서 개천을 따라 좀더 가보니 큰 다리가 있었다. 이 큰 다리는 예전에도 있던 다리였으나 그 당시에는 거의 가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하숙집으로 돌아올 때는 지하철역에서 나와, 북쪽으로 좀 걸어오면 작은 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를 건너 막다른 길에서 바로 왼쪽으로 돌면 5섯번째의 집이 오른편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는 가옥은 없어졌으며 길도 없었다.
따라서 아직도 오리무중 상태로 스코틀랜드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다시 찾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 대망의 Campus 방문
그 다음 날 24일엔 대망의 모교를 찾았다. 1957년 그 옛날에는 교사 정문 앞길 건너편에는 큰 광장이 있었고 중앙에 분수도 있었다. 2017년 60년만에 돌아오니, 그 넓은 땅에는 많은 다른 건물들이 새로 건설되어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옛날의 구조를 보며 감개 무량했다. 이 건물 안을 두루 다니면서 옛날 기계공학과에 속한 강의실 및 연구실험실 도서관등을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옛 건물 뒷 쪽으로 옛 건물과 연결되는 디귿 자의 신축된 큰 Campus를 발견했으며, 내가 찾는 여러 부처를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알았다. 밖에 나와 보니 옛 건물의 오른쪽에 있는 길 건너편에 신축건물이 있었으며 이것은 Student Services Building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가서 “만 60 년 만에 모교를 다시 찾아왔다 ”고 통성명을 하고 “나의 당시의 하숙집 주소를 알고자 한다 ”고 한즉, 그 옛날의 자료는 Micro-film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자료를 얻으려면 몇일을 요한다고 했다. PC가 존재하지 않은 당시의 자료가 Digitize 되어 있지 않음은 당연한 일로 이해가 되나, 매우 아쉬웠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Edinburgh로 떠나게 되어있었기에, 막내 아들 Rich의 e-mail 주소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이 사무실을 떠나면서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그 자료를 받을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 Scotland 일주 여행
옛 Scotland 왕국의 수도였던 Edinburgh에 저녁 늦게 도착하여 유숙한 곳은 University of Edinburgh부근의 한 호텔이었다. 여기는 내가 60년 전에, 이곳에 유학중인 한국학생을 만나기 위하여 Glasgow에서 가 본 이래 ↗
↘두번째의 방문이었다. 그 다음 날 오전은 이 대학의 Campus를 돌아보고 Edinburgh Castle을 구경하였으며, 오후부터는 Dover 해협을 따라 북상했다. 북상하면서 곳곳에 있는 “Carry-out” 같은 간이 식당이 있었으며, “Fish &Chip”같은 단순한 메뉴만 있었다. 여기의 Fish는 명태/동태(haddock). 동태는 옛날에는 한국의 동해에도 풍성하게 잡히던 어류인데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이 어류들은 다른 추운 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보다 북쪽인 북위 45도 정도의 Scotland 해안에는 이 어류가 풍성함을 알았다. 그러나 60년 전에도 식료품 상점에 가면 싱싱한 동태가 있었고, 한 때 자취생활을 할 때 동태국을 끓여 먹던 옛 추억에도 잠길 수 있었다.
우리는 해변가를 따라 북상하여 오후 늦게 Craigellachie 마을에 도착했다. 저녁식사에 Dover 해협에서 딴 매우 큰 굴을 담은 요리를 먹은 후, 유숙할 호텔 lounge의 fire place앞에서 우리 부자 4 사람은 둘러 앉아 Scotch tasting을 즐겼다. 과연 Scotch whisky의 원조 답게 GlenDoronach, Glenrohes, Macallan, 등 약 20 종류의 위스키를 작은 잔에 담아 음미했다. 아들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거의 같은 맛이었으나 60 년만에 이 나라에 다시 와서 세 아들과 함께하는 기쁨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 다음 날에는 Craigellachie 부근의 Macallan Scotch의 제조회사를 방문했다. Whisky제조의 복잡한 여러 과정의 설명을 들으니,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물, 그 지방의 물의 독특한 품질부터 시작하여, 그곳의 기후 등 여러가지 변수가 독특한 Brand의 Scotch가 탄생함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이 때쯤, Rich가 Strathclyde University에서 e-mail을 받았으며 옛날 나의 하숙집 주소를 얻었다. 우리 일행은 계속하여 북상하여 북해(North Sea)에 이르렀다. 여름에는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어서, 여러 시설을 가지고 있는 건물들이 여러 채 있었으나, 1 월 말인 그 때에는 사람들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이제 Glasgow로 돌아가기 위하여 동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도중에 있는 Loch Lomond 를 비롯한 여러 호수(Loch)의 풍경과 스코틀랜드 국화(國花) Heather 로 덮인 산들을 감상하며 Glasgow에 온 것은 오후 3 시쯤 되었다.
■ George Campbell Jr. 를 만나지 못한 실망
우리는 바로 Campbell 댁을 찾았다. 놀랍게도 처음 Glasgow에 도착하여 찾았던 바로 그 집이었다. 그러나 그 집 현관문을 열고 나온 사람에게, 이 집이 George Campbell Jr. 댁인가를 물었더니 “아니 ”라 고 했다. 그 때의 실망스럽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 집 주인에게 이 집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를 물었더니, 약 30 년이 되었다고 했다. 즉 Campbell 일가는 오래 전에 이사를 간 것을 확인하고, 우리 아들들은 Glasgow 시에 있는 Campbell이라는 이름의 data base에 따라 탐색했으나 다 George Campbell Jr. 하고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지난 60 년간 변한 하숙집 부근의 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즉 하숙집 부근의 다리는 없어지고, 이와 연결된 남쪽 도로는 주택지로 채워졌고, 하숙집 왼 쪽으로 길과 주택지가 개천을 따라 신설되었다. 이런 결론에 따르면, 옛 하숙집 부근의 다리가 사라질 이유도 추측할 수 있었다. 즉 개천에 따라 수많은 다리가 있었던 그 당시에는 주민들이 걸어서 지하철을 탔지만, 자가용 승용차가 많아 짐에 따라, 다리의 수가 줄어들어도 모두 큰 다리를 이용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옛날에 부근의 큰 다리에 거의 가본 일이 없었음도 이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개천을 따라 길도 없었고 주택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생각을, 나머지 여행중에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확인해보았다.
나는 이 여행이 60년의 세월 속에 강산도 변하고 사람도 떠났으나 그 시절의 삶을 돌아보고 소원성취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