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달에 육박한 길고 긴 여름방학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 아이들과 함께 개학 준비를 하다보니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검정 교복과 빳빳하게 풀 먹인 흰 카라 위에 빛나던 학교 뺏지와 이름표, 검은색 쓰리세븐 가방을 들고 어색한 단발머리를 쓸어올리며 거울 앞에 서 있던 여중생. 문학소녀 흉내를 내며 예쁜 편지지에 좋은 글귀나 감동 어린 싯귀를 적은 손편지를 주고 받던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새침해진다.
상담사로 일하게 된 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때 즐겨 외던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자주 생각난다. 꿈 많은 여중생이 얼마나 삶에 속았다고 그 싯귀를 공감하고 읖조리고 다녔는지… 지금 돌아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어른이 되면서 삶은 결코 교과서의 가르침처럼 녹녹치 않고, 나의 계획과 무관하게 터지는 예측불허한 일들이 삶을 송두리채 바꿔놓을 수 있음을 배웠다. 내담자들이 찾아와 삶이 자기를 어떻게 속였는지 보여주 듯 자신들의 아픔과 고통을 꺼내놓으며 억울해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시인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나보다.
그런데, 문득 ‘삶이 우리를 속인건가? 아니면 기대한 삶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 내가 속았다고 믿는건가?’란 질문이 마음에 던져진다. 나는 삶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지?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고 말하지만, 정말 즐거운 날이 꼭 오는가? 이러한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혹시 내가 속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가 삶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각과 관점을 되짚어 본다.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생각 혹은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끔씩 다시 꺼내 읽어보는 책 중에 정신과 의사 스캇 펙(M. Scott Peck)의 ‘아직도 가야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이 있다. 폭설에 집에 갖혀서 오랫만에 다시 꺼낸 첫장 첫 줄에 씌여진 ‘인생은 힘들다(Life is difficult)’란 글귀 앞에 멈춰 섰다. 이제야 이 한 문장이 진심으로 가슴 깊이 인정된다.
‘맞다… 이게 인생인지.’ 진심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문제해결 의식이 꿈틀거린다. 많은 내담자들이 이 진리를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왜?’라는 질문에 묶여 있다. 계획하고 꿈꾸는 아름다운 삶이 보이는데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저 사람 – 많은 경우 배우자나 자식- 때문에 내가 꿈꾸는 삶을 이룰 수 없다고 속상해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사람을 바꾸려고 에너지와 열정을 쏟지만 꼼짝도 안하는 그 때문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삶은 문제들의 연속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외칠 수 있는 일들이 지금도 세상에 일어나고 있다. 책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고통과 상처와 아픔 가득한 현실이 내가 만나는 내담자들의 삶에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삶은 문제들의 연속’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삶이 힘들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이제 필요한 것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은 의지와 어떻게 해결할까에 대한 방법에 에너지를 쏟게 된다. 문제를 무시하거나 피하면 잠깐은 해결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옴을 경험으로 우리는 배웠다. 문제를 받아들이는 용기와 지혜 또한 필요하다. 함께 문제를 풀어줄 조력자나 잘 훈련된 상담사를 찾거나 좋은 책을 통해서 배우는 방법도 있다.
다가오는 삶의 문제들을 피할 수 없다면, 이제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problem solving)로 관점과 시각을 바꾸는 일. 그 것이 삶이 나를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워싱턴 가정상담소 카운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