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신의학에 평생을 바친 ‘지성인’

김해암 박사 (의대 52)

김해암 박사는 문화정신의학 분야를 20년 동안 강의해 오며 코넬 의대에서 정신과 수련의 과정을 지도하고 있다. 종합병원 소속 정신과 전문의 직장 경험과, 공립과 사립학교의 정신과 상담의사로서 15년 이상 근무한 경력과 함께 개인연구소를 통해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맨하탄에서 해오고 있다.

한인 정신건강 협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며 유학생, 한인 2세들을 위해 봉사해 왔으며 뉴욕한인회, 뉴욕 라이온즈 클럽 등에서 동포들의 정신건강 세미나에 참여하는 등 한인사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또한 김 박사는 서울대 미주동창회 종신이사이기도 하다.

정신의학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김 박사를 특별인터뷰에서 만나본다.

<편집자 주>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 달라

나의 부친이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서양의 목축업을 시작 한 곳이 함경북도, 두만강 강변에 있는 옛 6진의 하나였던 종성이라는 고장이다.

그 비옥한 강변 땅은 온갖 곤충의 왕국이요, 수십 가지의 개구리, 온갖 조류, 산에는 봄에 진달래가 만발하고 야생 청포도(Blue berry), 깨미 Hazelnut 등으로 덮여 있고, 우리 목장 뒤 산은 밋밋하게 뻗은 뱀 산이 있어 젖소 방목에 편했으며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해 온 고장이기도 하다.

약 10년 전에 백두산 기행을 중국 쪽에서 했을 때 종성을 강북 만주 땅에서 보고 온 기억이 새롭다.

또 하나의 이색적인 기억은 내가 8살때에 평양 고모님 댁에서 일본학교에 다니던 기억이다. 처음으로 고모가 모시던 영국 성공회 차드웰 신부님 방을 내가 차지 했는데, 그 분이 일제가 영국으로 강제송환 된 후였다. 서양문화가 잔뜩 담긴 그 방에서 나는 2년 반을 공부하면서 즐겼다.

■서울대에 입학하신 계기는

1.4 후퇴로 우리 가족은 대구 동촌에, 나는 부산에 살던 고모 댁에 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52년에 부산에서 서울 의과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나의 소원은 문리과에서 지질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의대를 가면 병역을 졸업 후에 간다는 이유로 2차 지망이었던 의대로 진학했다. 아마도 지질학을 했으면 수입면에서는 월등하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미국행을 선택한 이유는

1958년, 의대를 졸업하고 군에 복무하면서 장래를 구상하였다. 중년 선배인 성형외과 의사가 수련을 마치고 같이 개업하자고 끌었으나 나의 희망은 정신과에 있었다. 중학교 때 이웃 여자친구가 사변 중에 결핵이 전신에 퍼져 사망했을 때 정신이상이 있었다는 소식이 충격이었고 의대 3학년 때에 정신과 교실에 가서 숙직하며 인슈린 쇽 치료를 경험한 것도 하나의 동기였고, 또 당시 서울의대 학장이었던 명주완 박사가 정신과 교수로 미국으로 가서 역동학적 치료를 배워 오라는 부탁도 있고 해서 유학 길에 올랐다.

■정신과를 선택하게 되신 계기는

1960년대는 정신분석이 전성을 이루던 세대라 정신분석으로 인격 완성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1959년 서울의대 대학원 과정에 이부영 교수와 내가 합격했는데, 이부영 교수는 스위스에 가서 칼 융 학파 심리분석을 하고 나는 미국에서 신 프로이드 파 정신분석을 하여 모교의 정신의학을 세계수준에 기여하자고 했던 것이 계기였던 것 같다. 현대 정신의학은 정신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화와 문명을 다루어야 하는 학문으로 발전해 왔다.

어떻게 하다가, 인간 사회가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현재 자가 동착적으로 인간 자체를 부정하려 드는 문화를 키워 왔느냐 하는 심각한 기로에 서 있다고 보는데, 문명의 발전에 불만이 있다면 의식/무의식 적으로 다가오는 자멸의 위험을 등한시하거나 무시해 버리는 무서운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면 21세기에 사는 우리 인간들은 모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런 자학적인 문화를 타파하고 프로이드가 만년에 인류문명의 멸망을 내다본 비관을 상기해야 한다.

■ 한의학 면허를 취득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한의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는

내가 25년간 일하던 카톨릭 종합병원에서 은퇴 후 혜택과 더불어 내가 원하는 대학 1년 수험료를 내주겠다는 호의를 받아 한의학 과정을 마쳤다. 뉴욕 한인사회 유지들의 간청으로 뉴욕의 한의과 대학을 한 사립대학 부속으로 설립하려고 노력하다 뉴욕주가 인가까지 받고 그만 둔 꿈을 이루어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학위로 1990대 중반에 코넬 의대 학생들에게 한의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침술을 정신병에 이용하는 방법도 시도했는데, 특히 강박증의 경우 한, 두 환자의 효과를 본 경험으로 앞으로 연구 대상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 뉴욕한인회, 뉴욕 라이온즈 클럽 등 뉴욕한인을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계신데..

1959년에 뉴욕에 도착하여 줄곧 뉴욕 주변에 살아왔고 또 일 해 온 관계로 뉴욕은 누구보다 못지 않게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첫 뉴욕에서 가진 1959년 크리스마스가 콜롬비아 대학 I-House에서 있었는데 모인 사람이 30-40 명 정도였고, 매년 그 정도 모인다고 했다. 당시 남궁 총영사와 부인(나의 동창생의 누님)은 못 나왔으나 메세지를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맨하탄에 한국 음식점 한 곳과 삼복 식품점 한 곳 뿐이었다.

몇 년 후에 한인회가 생기고 라이온스 클럽도 생겨 모임에 참석도 하고 강의를 돕기도 하였다. 그 당시 정신건강, 특히 정체성의 문제가 지금 보다 훨씬 심각했다.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내 나이 세대는 일본인 행세를 하여 차별 대우를 모면하기도 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나는 뉴욕의 유명한 Free Walking Tour가 매달 있는데 수십년 간 기회가 있는 대로 참석하여 뉴욕을 구석 구석 돌아다니는 취미를 가졌고, 각종 음식점을 찾아 다니는 것도 하기도 했다.

1997년에 병원 해프타임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 7년 간 자원봉사로 한인 정신건강 크리닉에서 매주 하루를 어려운 환자 진료를 했다. 여기서 보기 어려운 한인 환자를 많이 보고(한국에서 개업을 방불하는 경험), 운영의 관한 것도 도왔다.

뉴저지의 경험을 살려 뉴욕 한인사회에 정신건강 협회를 조직하였고 한인 정신건강협회, Korean American Behavioral Health Association(KABHA)라 칭하고 매년 100여명의 정신건강 학위를 따고 졸업하는 한국 2세들들 모아 친목하고 한인 사회를 돕는 행사를 15년가량 지속했다. 내가 첫 2년을 회장으로 있었으나 자금을 끌어들여 봉사 활동을 벌려야 하는데 실패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야 함을 알았지만 직장을 만들고 지도해 주고 하자면 생애를 받쳐야 가능함을 실감했다.

따라서 나는 개업을 함으로써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왔고, 유학생들의 학교 문제, 법적 소송, 비자 문제, 학교 당국과의 갈등, 등의 내용을 다루었고 재력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언제나 무료로 봉사해 왔다.

나는 미국 공립 학교, 사립대학 등에서 의뢰 오는 환자를 20여년 다루어 왔기 때문에 청소년 문제는 어느 문화 권에서나 경험을 해본 경력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타인종인 아내와의 결혼생활로 다문화에 대한 생각과 철학이 남다르실 듯 한데..

60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지내 온 사실을 다 알게 된다.

그 입장에서 나의 인생 경험을 솔직하게 말 해 본다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꼭 있어야 할 일인 듯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터 놓고 Inter-marriage을 말하는 것을 꺼려 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말을 해 보려 한다.

억지로 백인 여자 의사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가족을 중요시하는 한국적인 정서 때문인 것으로 분석이 간다.

나의 정신분석 수련 과정에서나, 나의 개인 분석 치료에서도 문제시된 것은 인종이라는 문제의 해결을 분석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체험할 수 있었다.

부부 치료도 해보고, 애들과 함께 가족 치료도 해 보았기 때문에 정신치료 라는 것이 지식 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경험으로 만 되지 않는 것임을 발견한 나는 문화 철학의

필요성을 느끼고 연구해 왔다.

오늘날 팬데믹으로 새로운 경지를 가고 있는 인류 문명은 아마도 새로운 문화 철학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나의 결혼 생활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첫째, 초기에 레이디 퍼스트를 철저히 시행했다. 누가 하라 마라 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해 진 것이지요. 서양인에게 잘 해주어야 한다는 동양인에게 주어진 서양인의 교만과 더불어 우리 선조들의 우매함에 있어, 덮어 놓고 서양 사람은 우리보다 정직하고, 선하고, 낫다는 개념을 전달 받은 선입관 때문이기도 했다.

둘째, 백인들은 대부분 성실한 기독교인들인데, 개인주의 때문에 많은 종파를 만들어 독선적이고 교만한 데가 많으나 잘 가늠을 한다. 결혼 초기부터 교회에 봉사하며, 장로직도 하고 노회직도 10년을 맡아서 하다 보니 교회 내의 정치를 알게 되었다. 나의 처는 교회에 열심이고 찬양대에도 늘 나가는 충실한 교인인데, 종교심에 있어서는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형식은 잘 지켜 감에 감사한다.

셋째, 대인 관계는 나의 처가 훨씬 잘 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데, 문제는 겉으로는 친절하고 존경을 받고 좋아하지만 깊은 친구를 사귀는 성의는 부족하다. 또 가족 간의 사랑도 개인주의 우선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유지함에 어려움을 느낀다.

넷째, 무엇보다도 오래 살다 보니, 인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 인간성은 인종에 관계없이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문화권에서나 통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이 들어 깨닫게 되는 것은 서양 문화가 얼마나 서양인들에게 다양한 성격을 만들어 주었나 하는 것으로, 인격장애가 동양인에 비해 비교적 심각하고 많다는 결론을 얻은 것은 정신과 면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다섯째, 서양 사람들은 사고의 전개가 우리 보다는 빠르고 다양하다고 본다. 따라서 인격 분석을 하려면 심층 연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사고 방식은 동양인이 따라가기 쉽지 않은 것 중의 하라고 본다. 이렇게 나는 아내가 백인을 대표한다고 보고 나로 써 일반적 판단을 시도해 보았다.

■ 현재 미국내 가장 큰 이슈중에 하나인 아시안 혐오범죄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이런 현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언제나 미국에 있어 온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조심하고 정치적으로는 반대 시위를 해서 위상을 차리고 법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변모한 것은 동양인에게 큰 다행으로 본다. 아시안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질투심을 갖는 것은 백인뿐 아니라 흑인이나 라티노도 마찬가지다. 장기적으로 해야 할 것은 동양인의 미와 특성을 서양인에게 잘 알리는 문화를 창조해 내는 것이 있어야 하겠다. 눈이 크고 색이 있고, 얼굴에 곡선미가 있다고 아름답게 보는 관점에서 동양적인 매끈하고, 섬세한 아름다움 또 그 미덕을 찾아 내고 표현하는 기풍이 생겨 나는 날이 오리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미국에 있는 차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미국 땅에 자리잡고 사는 우리 후배, 2세, 3세들이 타 인종들과 어울려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다만 주의할 것은 각자의 인생을 과거와 미래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 세대가 살아있는 동안 한국 땅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민 올 때 풍습을 그대로 가지고 여생을 사는 것에서 탈피하고 우리 후손들의 새로운 미국인 역할을 환영 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영국에 살던 사람들이 신대륙에 와서 그 전통을 그대로 답습, 300여년 후에 현실을 바로 보고 독립을 했다. 우리는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우리 자손들이 세계의 시민이 되어 새로운 미국사회를 다른 온갖 인종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그런 의식을 차세대들에게 심어주고 밝혀 주는 지혜를 공유해야 하겠다는 말을 해주며 나 또한 다짐한다.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