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의 산업발전’위해 일생 바친 공학자

<특별 인터뷰>

이용락 박사 공대 48/ 미주동창회장 역임(6대)

“내 인생의 목적은 모국의 산업경제 발전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여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다”

서울대 미주동창회 6대회장인 이용락 회장은 일생을 한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학자이다.

일본 군수공장의 노무자로, 소련군 포로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해방을 맞이했고, 일본 식민지시대를 경험하며 부강한 나라를 꿈꾸며 마침내 기계공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공부한 후 미국에 머물면서도 한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재미한국과학 기술지협회(KSEA 중서부 지부)창설은 물론 휴가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한국을 오가며 국책사업에 참여했다. 좀 더 한국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경제적 고난을 감수하고 사설 연구소도 창립했다.

이처럼 일생을 모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헌신한 이용락 박사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동문들께 소개한다.

<편집자 주>

아래 글은 동창회보가 기획하여 진행중인, 동문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기록하는 난에 초대되어 쓴 글입니다. 편집부에서 낸 질문서를 보며 쓴 초고가 망백의 시점에서 쓴지라 길어져 축약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전대미문의 역질 코로나(Covid-19)로 만나보지 못하는 동문들을 생각하며, 모두 안녕하시기를 바라며 씁니다.

1.미국에 오게된 이유는

나는 공대 기계공학과에 1948년도에 입학하여 6.25 전란 중에 군 복무를 지원하여 마치고 복학 후 1953년 3월 졸업하였다.

1957-58년 영국의 British Council Scholarship으로 Royal College of Science & Technology(Glasgow, Scotland)대학원에서 Power Engineering분야의 Postgraduate Diploma를 받고 귀국하여 부산대학교 공대 기계공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공대 학장이던 김형규 선배의 권유로, 1963년 문교부에서 전국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미 국무성의 풀브라이트 장학금(1년)에 응모하여 선발된 합격자(인문계, 이공계 도합 9명) 중 일원이 되어, 1964년 University of Illinois, Urbana-Champaign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1년 장학금이 끝날 즈음, 지도 교수이던 S. L. Soo 박사의 연구 조교가 되어 학비 걱정 없이 1969년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Turbulent Jet of a Charged Suspension, August, 1969). 박사학위 논문을 써 놓았지만, PC가 없던 당시에는 타자수가 긴 시간동안 일일이 타자해야 했고 나의 연구조교 월급이 없었기에, 가족은 Urbana에 둔 채 시카고 근교의 Borg-Warner 연구소의 Heat Transfer 실에 취직해서 주중에는 직장에서 주말은 집에 가서 타자된 논문을 점검하고 가족과도 만났다. 드디어 8월8일로 정해진 논문발표와 심사 교수들의 질문에 대한 방어 답변을 마치고 나왔을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S.L. Soo 박사가 “축하합니다. 이 박사!” 라고 했던 그 순간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직장에 돌아와 온즉 기다렸다는 듯이 Manager가 불러 갔더니, “다른데 가지 말고 여기서 일하면 어떠냐?” 하기에 풀브라이트 규정상 학업 후 귀국하여야 한다고 말했더니, “그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줄 터이니 염려말라”고 해서 그 연구소에서 계속 일했다. 결국 이 연구소의 힘으로 귀국 의무의 면제 대상으로 추천되어 미국에 영주하여 연구자의 길을 걷었다.

  1. 나의 인생의 삶을 되돌아 보며

나의 삶의 도정은 파란만장하였으나 대인관계의 의리를 존중하는 인생관과 대학입학 시 공학도가 되어 해방 조국의 산업경제에 기여하리라는 초지대로 살아온 것 같다.

1945년 4월 초 당시 재학중이던 만주(滿洲) 길림의 길림중학교(吉林中學校) 4학년에 진학하자마자, 만주 북부 봉천(지금의 심양)의 일본 관동군 (關東軍)의 군수공장(폭탄용 화약공장)에, 일본인 동급생들과 함께 노무자로 동원되어, 8.15 해방 때까지의 4개월 동안 생지옥을 경험했다. 진주한 소련군의 포로생활도 2개월간 경험했다. 또 외가인 함북 일신(日新)에 돌아와 북한이 적화 되는 상황을 보며, 1946년 8월 부모님과 함께 밀선(18 톤 발동선)을 타고 자유를 찾아 공해(公海)를 따라 남한으로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수장의 위기 속에서 선장실에서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 저희들은 지금까지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들이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가고 있으니 저희들의 생명을 구해 주십시요!”

그 후 선장은 남하 항해를 중단하고 육지로 직진하여 도달한 곳이, 38선 바로 이남의 강원도 묵호(墨湖)였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 후 동해안을 따라 다시 남하하여 포항에서 하선하여 서울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2가에 아버님이 8.15 해방과 더불어 마련해 두신 집에 도착하였다. 나는 무녀 독남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며, 한번도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나, 대학진학 시 기계공학도가 되리라는 결정은 법과대학을 가라는 아버지의 기대나 의과대학 진학을 원하시던 어머니의 소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조국이 일제식민지가 되어 일본 경제의 소비지로 전락하였던 현실을 보며 자립 부강하는 나라는 공업이 필수적이라 생각하여 기계공학도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대학입학 후 적성에 대한 회의도 있었으나 초지대로 계속하기로 하였다. 3학년이 되었을 때 동족상잔의 6.25 사변이 발발하여 국군에 지원 입대하여, 제대 후 부산으로 피난 간 전시 연합대학에서 비가 오면 새는 가교사에서 공부하여 1년 후배와 같이 1953년 3월에 졸업하였다.

 

당시 취업이 어려운 때라 우선 UNCACK (UN Civil Assistance Command, Korea)에 한국신문 번역관으로 6개월 근무할 기회가 있었고 풍족한 월급도 받았다. 그러나 졸업 후 당시 기계공학과  출신자의 일자리가 없던 때였고 당시 가장 인기있는 직업은 고등학교 물리나 수학 교사였다. 나는 초지를 따라 박봉이지만 부산 영도의 대한조선공사 (大韓造船公社)에 기수(技手, 공원과 기술자 위의 직책)로 취직하였다 (기수의 봉급은 고등학교 교사 봉급의 50%이고 번역관 봉급의 43%정도였음). 이 직책은 영업부에서 주문 받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계부 등 각 부의 요청에 따라 현장의 공원부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하는 일이었다.

1년이 지난 1954년 당시 조선공사의 기술고문이자 부산 수산대학 조선학 과장이던 조운제 교수의 요청으로 수산대학 어로학과 (漁撈學科)의 “선박기관학”와 조선학과(造船學科)의 “기계설계학”을 강의를 맡게 되었다. 이는 뜻밖의 기회였는데 대학 2학년 때 정재구(鄭在求) 교수(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졸업)에게서 잘 배웠던 기억과 강의내용을 충실히 기록한 나의 공책이 힘이 되었다. 또 1년 동안 조선공사의 선박기관실에서 실무를 보며 독학한 경험과 지식이 있어 마음의 준비가 되어, 대학 초임강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대학교육은 전쟁 후라 도서관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고, 대학생 시절의 강의 필기 공책이 중요하였는데, 전란 중 을지로 2가에서 황급히 피난 보따리를 싸서 대구로 부산으로 피난생활을 하였는지라 그 공책이 살아 있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로 서울에 계신 어머님이 알려 왔다.

또, 강사가 되기까지 에는 조선공사에 함께 재직하면서 서로 신뢰하며 가까이 지냈던 일제시대의 육군항공대 조종사 출신인 김택만씨가 수산대학의 선박기관학과 강사로 나를 조운제 학과장에게 추천한 것을 나중에 알았다. 당시 25세로 나보다 연장자인 28세의 가장을 포함한 학생들을 상대로 넓은 바다를 누빌 어선의 선장으로 나갈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나는 90분을 쉬지 않고 열강 하였고, 학생들도 그대로 따라서 나름대로 보람된 기억으로 남아있다.

  1. 인생에 있어서 행운의 대표적인 예

모교 졸업 후 기계 공학도로서 학업과 연구자의 길을 평생 가는 길에는, 세번의 기회가

반전의 곡절 속에서 행운으로 다가왔다.

첫째, 1955년 국비유학 장학생으로 33명 중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가, 국가 예산 부족으로 취소됐다. 두번째는 1957년 단 두 명이 선발된 British Council Scholarship의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 세번째, 1964년 미 국무성의 1년 장학금으로 유학 와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지 않고 계속하여 연구자의 길을 가게 된 과정이다. 이 과정의 자세한 사연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며 나의 삶의 과정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 나의 애국적 초지의 발현

나는 Borg-Warner 연구소에 근무하면서도 항상 모국의 산업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길을 잊지 않았다. 드디어 그런 기회가 왔다. 1971년 12월에 재미한국과학기술지협회 (KSEA)가 미국 동부의 과학기술자들 중심으로 창설되었으며, 시카고에서도 1972년에 KSEA 중서부 지부를 결성하는데 나도 참여했다.

KSEA는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의 산업경제발전을 위한 방대한 계획을 실현하는 데는, 산업경제 발전의 기초인 과학기술자들의 보고인 미국에서 재미한국과학기술자들의 한국으로의 유치가 급선무였다. 나는 1974년에는 KSEA 중서부 지부장, 1981년에는 KSEA 전국회장을 맡아 많은 인재들을 한국으로 가는데 일조하였다. 나 자신도 나의 휴가를 가족과 보내기 보다는 한국의 초청으로 거의 매년 귀국하여, 한국의 국책연구소 및 산업체로 부터의 자문에 응했다.

그러나 미국의 산업체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의 기술발전에 이바지하기에는 큰 제약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 나이 57세에 Borg-Warner연구소를 조기 은퇴하고 Heat Transfer Research & Development, Ltd.(HTRD)라는 사설 연구개발회사를 창설하였다. 미국정부의 연구비도 받아서 한 연구 결과를 학회에 출판하고 나면, 그 이후의 지적 재산권은 나의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한국을 위하여 이바지할 수 있었고, 한국의 대기업의 용역도 맡았다.

그러나 사설연구소 창립은 개인의 경제에는 큰 모험이었다. 그러서 상당기간 경제적으로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일이기에 고난을 감수했다. 이런 시대상황과 곡절 끝에 내 나이 80이 넘어서야 HTRD가 호전되어, 90이 넘은 지금 아직도 어린 손자 손녀들의 대학진학 기금에도 기여하고, 아내를 위한 장기 건강보험도 확립해 놓았고, KSEA 등 사회단체에 기여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도 내 힘 만으로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가호라 생각하고 감사드린다.

  1. 그 동안 여행과 추억에 가장 남는 곳

간단히 여행지만 나열하자면, 두번의 캐나다 단풍 구경, Brazil과 Algentina와 그곳의 Iguazu폭포, 거대한 예수 그리스도 동상, Algentina의 탱고 원산지와 Peron의 묘지 방문, Costa Rica의 온천지대와 열대 동물원 구경과 1958년 영국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기 전에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350 (현재 가치로 $3,500이상)로 유럽여행 한 것과 2017년 세 아들과 첫 유학지를 60년만에 돌아본 수구초심의 추억의 여행이다. (동창회보 2021년 3월호 게재)

  1. 수상 기록과 소감

나는 남 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음과 같은 상을 받은 바 있다. 1) 1985 년 과학의 날에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특수 열교환기의 개발한 공로로 받았다. 2) 2009 년에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에서 최고상인 Outstanding Contribution to KSEA Award을 받았다. 3) 서울대학교로 부터 2010년 (이장무 총장)과 2019 년(오세정 총장)에 공로상을 받았다.

  1. 사업 혹은 나의 성공담

미국에서의 나의 첫 직장은 Borg-Warner 연구소 연구원이었고, 1986년에 사설연구소 (HTRD Ltd.)를 설립하여 35년간 운영했다. 나의 목적은 모국의 산업경제 발전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여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다.

  1. 서울대 미주동창회에 바라고 싶은 점

미주 서울대 동창회는 모국을 떠나 광활한 미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동문들이 동문수학의 연으로 선후배가 서로 사랑하면서 돕는 조직이다.

미주 총동창회가 창립된 지도 벌써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목민 처럼 운영되고 있어 우선 동창회관이 고정되길 바란다. 이 광활한 땅에 우리 미주총동창회가 모교와 서울대총동창회와 협력하여 SNU House를 미국의 동부, 서부 및 중부에 마련하여 모교의 대학원 학생 및 교수들이 미국에 연구하기 위하여 체류하는 동안 도움이 되는 시설로 발전하기 바란다.

또한 이 시설은 우리 동문들의 자제와 손자들이 대학 진학을 위하여 “Campus Tour”를 할 때 부모들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기회가 되며, 이 구상은 본인이 재임하던 6대 집행부(2001년 7월 1일부터 2003년 6월 30일까지)의 동창회보 (SNUAA Chicago-SNUAA USA Newsletter Archive 2001-2003)와 평의원회에서 동문들이 제안한 바 있다(http://www-world.com/snuaausa_newsletters_archive/snuaausa111-112_ 20030628.pdf). 우리 동창들의 일상생활에 필수인 의료, 자동차, 주택 등 특수보험사업을 펴면 8천명의 우수한 동문들의 상부상조하는 사업이 되며 그 이윤으로 모교에 재학 중인 후배와 동문들을 지원하는 장학사업의 재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대략 3천명의 집단이 되면 보험사업은 유망하다 함). 이러한 목적을 가진 SNU House의 구체적인 설립 계획과 사업 예산들을 포함한 구체적인 계획을 내면 현재 잘 진행되고 있는 종신이사비와 독지가들의 큰 뜻있는 출연으로 설립 구상은 구체화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맺으며 본인 가던 신학도의 길에서 특별한 인연으로 어린 세 아들을 둔 상처한 공학도와 결혼하여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헌신한 나의 아내 조윤혜에게 감사한다.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