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으로 사망의 골짜기를 몇 번 넘은 후 나는 부산 보 수 동에 사시든 고모 댁에 가서 서울고 천막 학교에 고3 생활을 하면서 서울고의 열성적인 입학시험지도로 의예과에 합격하였다. 전국에서 수석 졸업생이 20-30명인 클래스 수업 열은 대단했고 당시 의학과는 공학과와 함께 징병 면제로 많지 않은 대학생들은 혜택을 입고 졸업 후에 군에 봉사했다.
1953년에 서울 연건동 캠퍼스에 이전하고 정식으로 전시의 대학교육을 경험하였다.
나의 부산 고모 댁에는 당시 영국계 성공회 신부님이 살고 계셨다. 고모가 평야에서 전도 부인으로 모시든 심부 님이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되었다가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 주교로 승진 가족과 함께 살고 있어 영어 회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환도 후에는 많은 미국 선교사들을 맞 날 수 있었고, 서울대학 기독 학생회장을 하면서 연세대, 이화여대의 대표들과 경쟁하던 기억이 새롭다.
종전 후에는 의대 본과 학업에 들어갔고 의대 학생 회장으로 서울대 부회장으로 윤보선 총장을 받들어 외국 손님 방문객의 안내와 영접을 한 경험은 재미 있는 추억의 하나이다.
군 복무는 다행히도 수도 육군병원, 121-미군 야전 병원을 거쳐 최전방에 나가 실전 경험을 하고 뉴저지로 인턴으로 온 것이 2059년 말이다. 동경, 사포로, 샌프란시스코 등 몇일씩 묵으며 여유있게 도착했다. 아마도 영어 회화 숙달의 이유도 있었으리라.
정신 의학 수련은 뉴욕 주립대학 부속병원에서 철저히 프로 이드 학파의 교수진에게 배웠고 정신분석 수련에 들어가 자기 분석과 수련과정을 4년 반에 마쳤다. 수료 과정 졸업 후 수년에 코넬대학교 의과대학에 교수로 들어가 50년 이상, 임상 교수로 남아있다. 이런 연고로 나는 줄 곳 뉴욕 맨하탄에서와 교외에서 오피스 개업을 해왔다. 나의 부 정공은 횡 문화 정신과학, 청소년 정신의학을 하면서 치료 방법과 기술 연마로 가족치료와 집단 치료를 배워 치료에 사용하였다. 나의 처는 영국계 앵그로색슨이고 소아과 의사로, 전공을 발전 행동 소아 의학을 한 관계로 국내 국외 학회에 많이 참석하여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백인 여의사와 결혼 한 이유는 나의 선택 이라기 보다 1950 년대의 한국 유학생은 대다수가 남자 였고, 교포 인구도 많지 않았으나, 그런 이유가 아니고 운명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봄이 옳을 것으로 본다.
정신과는 의대 4년생때 교실에 나가며 인슈린 속 치료를 도 맡아 3개월을 한 경험은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뉴욕, 부룩크린에 위치한 뉴욕 주립대학이고 시립 병원의 바쁜 수련을 거뜬히 해내고 정신분석 수련에 들어 갔다. 콜롬비아 대학 정신분석의 원로들의 지도와 수퍼비전을 받고 4년만에 졸업을 하고 대학 임상 교수로 횡 문화정신 의학을 20여년 강의를 했다. 정신분석 과정에서 자기분석을 2번 받았는데 나의 결혼 문제를 다루고, 나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와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감정과 인식의 차이를 다루게 되다 보니 문화성을 철학으로 풀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결론에 다닿았다. 그러므로 콜롬비아 대학 Heyman Humanity Center에서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화 철학을 정립해 왔다.
나도 어려서는 철학을 어려운 학문으로 알고 멀리했다. 알고 보니 철학 이란 인간사를 다루는 학문으로 고대에는 철학에서 종교, 예술 그리고 과학 까지도 비롯되었고 철학이 모든 인간사와 그 지혜를 다루었다. 왜냐하면 희랍의 철학이 한국의 철학과 같으면서도 달라야 하고 다른 것은 두 고장의 인간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왜 태어나며, 무엇을 위하여 살며 또 인생은 어디로 가며 또 가야하나, 등의 문제를 다루는게 철학이라면, 쉽게 철학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적 물적 환경인 문화를 통하여 배우고 이해 하는 것이 가장 쉽고 정확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의 경우, 백인여자와 결호하고 자녀 셋 다 박사 학위를 하다 보니 다양한 문화성을 가진 가정이 되었다. 가정 생활을 원만히 하려면 감성과 지성을 통솔하는 집단에 대한 지식과 가족의 역동적인 이해와 인식이 필요하게 되므로 문화 철학의 지식이 필수가 되었다. 이렇게 나는 정신치료를 현대적인 정신분석에 의거한 사회과학적 인식과 뇌 과학, Neuroscience을 바탕으로 삼는 문화 철학적 정신치료를 발전시켜오고 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어떤 혜택을 부여 하느냐를 간단히 설명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생과 인간을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마치 예술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을 어려서 부터 터득하는 요령을 배워야 하듯이 철학적인 생각도 어려서부터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어린이들에게 병이나, 죽음, 이혼 등이 정신적인 부담 내지는 타격을 가져 온다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보호 하려 하는데, 그렇게 하기 보다는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인생 철학을 경험하는 것이, 감추거나 비밀로 해 두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옳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부모들은 감추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어린이들도 애도하거나, 기념하는 행위를 부모와 같이 함이 인생을 배우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성숙도를 당겨 준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정체성의 확립 내지는 기본적인 자세를 이민자들이 어떻게 키워가야 하는가를 살펴보면 2가지 해결책이 있다. 하나는 자기가 가지고 온 문화성이 우월하고 특수하다는 자부심으로 가지게 하여 풀이 하는 방법과, 이민간 사회에 뛰어 들어가 빨리 적응하고 동화되는 것들이다. 한 예로 한국에서 외국인과 결혼하여 이민 가거나, 예술인이나 과학자가 우대를 받고 이민자가 되는 경우 언어와 풍습에 적응이 빠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문제는 이민 풍토에의 동화나 적응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식과 행복 감을 쟁취하고 자기의 이상을 객지나 어려운 환경에서 차별대우를 극복하 가면서 성공을 이루어 가는 방법이다.
나의 경우를 보면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고, 환경과 문화를 알고 익히는 과정이 좀 쉽게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의 처는 결혼 후 곧 자진하여 한국말을 개인 지도로 배운 것이, 이민 온 시부모와 가족을 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도 처의 가족과 친척을 기꺼이 맞 나는데 익숙해 지고 내 가족으로 대하고 접하는데서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안다.
그러면 직장에서나 대인 관계에서 정체성을 어떻게 구현 되어야하나 보면 대개는 무의식 적인 상하의 관계, 아니면 Dominant and Submissive 한 길을 터 놓거나, 자기 자신이 서로 동등하지 못하다는 것을 무의식 적으로 인정하고 대하는데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남녀 관계나 부부 관계에 있어 무의식으로는 굴종 하면서 의식으로는 반항하는 경우가 있는 경우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확실이 미국사회는 백인들을 우대하고 흑인 푸대접 내지는 학대가 자연스러울 만큼 형성 되어 왔다는 사실을 나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 여러 친척들을 찾아 보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우대를 받지 못하는 중산계급 백인들은 동해안 지역에서 중서부로 이전하거나 은퇴해서 플로리다로 간다.
흑인들은 보통 백인편에 들지, 동양인이나 유색인종의 편을 드는 것은, 같은 미 대륙 태생이라는 동포애도 있지만 덕을 보려면 백인 편에 가담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미대륙 개척자들이 300년 동안 영국 식민지 신세를 뒤로 했듯이 흑인들도 수백 년을 참아와 온 것을 보면 인간에게 노예 근성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 왔다는 사실이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탄생을 보았고 250년 동안 자라났다는 것이 미국 같은 이민자들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면, 유지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우리 모두가 공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앞으로는 인권의 동등함을 주장하는 것이 강력하게 정치적으로 반영되고 팬데믹으로 인간 의식이 날카로워 지면서 세계는 좀 더 평등한 고장으로 변화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문화 철학의 전망이다.
세계 어디를 여행하거나 나는 백인 대접을 받는 것은 처 때문인 것을 한 참 후에야 깨달았다. 결국 이런 모든 인생의 법도가 무수한 경험으로 만 남지 않고 지식으로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배우게 되고 인생 철학이 수많은 젊은 소크라테스의 탄생으로 하여금, 세계평화와 평등한 이상향적 사회로 발전 하리라는 희망을 가져보자.
서울대학인으로 어떤 일을 잘 하며, 이민 사회에 공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on the line 로 활발이 논의 되어야 할 문화 철학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남은 인생을 동료들과 함께 미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일꾼이 되기를 희망 함은 나 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