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직장’ 보잉 임원에서 국민훈장까지” 김재훈 박사 (공대 72)

 

“‘꿈의 직장’ 보잉 임원에서 국민훈장까지”

 

김재훈 박사 (공대 72)

 

시애틀 워싱턴주 김재훈 박사는 과학기술자로서 신기술개발로 그동안의 업적이 대단하다. 자랑스런 또 한 분의 동문이 그동안에 이룩한 업적과 성공담을 소개한다.

미국 항공산업의 상징인 보잉사의 싱크탱크인 보잉 기술연구소(Boeing Research & Technologyㆍ팬텀웍스 (Phantom Works))’에서 근무하고 있는김재훈 박사는 한인 1세대에게는 ‘롤 모델’(Role Model), 2세대에게는 최고의‘멘토’(Mentor)로 알려져 있다.

김 박사는 모교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후에 유학으로 미국에 이주해온 이민 1세대로서, 세계 최고 기업에서 한국인으로는 기술분야의 최고위직인 기술임원으로 오른데다 미국과 대한민국간의 협력 증진에 남다른 공헌을 하고 있기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이공계 출신 박사들이 자신의 업무에 매달려 사회 봉사등에는 나설 겨를도 없는 경우가 많지만, 김 박사는 전 세계를 누비는 바쁜 일정속에서도 한인 차세대나 후세들의 교육을 위한 봉사와 헌신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로로 김 박사는 지난 201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현재 보잉사의 연구ㆍ개발(R&D)의 핵심인 보잉기술연구소에서 ‘Executive/Senior Technical Fellow (STF)’직책을 맡고 있는기술임원(Executive Director)이다. 보잉에서 연구분야로는 최고직급이고 보잉에서 근무하는 수 십만명의 과학기술자들이 평생 꿈꾸는 자리다.

김 박사처럼 차세대 항공 우주산업의 핵심기술 가운데 하나인 통신과 네트워킹 분야의 STF는 보잉기술연구소에서 김 박사를 포함해 단 2명뿐이다. 항공산업의 지상통신은 물론 무선통신, 위성통신, 군용통신, 항공무선 인터넷 등 통신, 네트워킹과 사이버 보안에 관련한 연구, 기술개발과 자문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다.김 박사는 보잉이 추구하고 있는 상용 항공기 및 군용 통신분야의 청사진, 즉 로드맵을 설계ㆍ지원하는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김 박사가 보잉사에 입사해 기술관련 최고위직으로 오르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혁신적인 연구성과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까지 40여개의 보잉 연구 기술상과 NASA 신기술상을 수상하고, 100여편 이상의 과학기술 논문을 발표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연구개발에 노력을 해왔는지는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김재훈 박사의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 업적에 찬사를 보낸다.                      <취재=조직국장 백옥자>

 

-미국에 오시게 된 이유?

모교에서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혹독하기로 이름난 해군 사관후보생 훈련 18주만에 해군장교로 임관하여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3년간 군복무를 마친후에, 대한전기협회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박사과정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오게되었다.

– 유학시절의 어려웠던 점과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주로 재정문제이겠지만, 유학과 관련하여 학교, 전공선택, 지도교수 선정 등도 학업과 직접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이다. 유학을 준비했던 해군사관학교 재직시 진해에서 여러 미국학교와 유학 수속과정에서 수신인 주소가 진해로 쓰여진 우편물(입학허가서)이 국교관계도 없던 중국을 경유하여 몇 달씩 늦게 배달되기도 하여 무척 애를 태웠던 기억이 있다. 1981년에 40개월의 군복무을 무사히 마치고 7월말에 만기제대하여 2주일후 8월15일에 그 당시 유학생 전세기(유학생 할인요금으로 승객의 대부분이 유학생이었음)로 불리던 대한항공으로 미국에 첫 발을 디뎠다. 모두가 가난한 유학시절이었지만, 그당시 유학생사회의 분위기는 (도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유한 집안의 학생도 드러내놓고 사치를 하지 않아서 유학생들간의 빈부의 격차로 인한 위화감이 크지 않았다. 박사학위과정을 마칠 무렵에는 연구조교로서 등록금면제와 연구조교 월급($1,000·당시 3 Bed. 학교 아파트 월세 $180)으로 새 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차는 첫 직장이 있던 Pasadena, CA로 이사짐과 함께 보내졌고, 나중에 보잉연구소로 직장을 옮겼을때, 다시 이사짐과 함께 Seattle, WA에 도착했다. 이렇게 애지중지했던 이 차는 GM의 Oldsmobile 모델로 나의 유학생활 끝무렵을 함께 하며 우리 가족과 가장 많은 추억이 서려있다.

– 나의 인생의 삶을 뒤돌아 보며

지금에서야 나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깊이 숙고해 보기전에 우리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부모형제가 바라는, 그리고 가족이 원하는대로 수동적으로 살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이 헛 된것은 아니지만, 나를 잊고 내가 원하는 대신에 가족이 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새롭게 인생을 산다면 이러한 생각이 바뀔까? 쉽지 않은 대답이고,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것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남은 인생동안 계속 될 질문일지도 모른다.

– 어떤목적과 이념으로 나를 이룩하셨는지?

특별한 목적이나 이념을 가지고 일을 하지는 않았고,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더라도 중요한 고비마다 앞으로 5년후, 그리고 10년후의 나를 상상(주로 희망적인 상상을)하며 현재의 일과 앞으로의 계획에 참고하는 버릇이 있었다. 일찍이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 세웠더라면 지금에와서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 나의 앞의로의 계획은

유학생으로 시작하여 박사학위를 마친후에 미국 직장(연구소)에 정착하여, 40여년간을 정진해온 과학기술 연구활동에 유종의 미를 거둘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이제부터라도 은퇴후 제2의 인생을 위해 차분히 계획을 세워볼 생각이다.

– 가족관계(아내를 만난 사연/ 자녀근황)

40년 인생의 동반자가 된 부인과 한 살때부터 미국에서 성장하여 현재 Microsoft에 근무하는 아들과 서울대 후배이며 Genetics분야에서 촉망받는 과학자인 며느리, 그리고 귀여운 손녀가 있다. 부인은 대학원 재학시 학부 후배(현재 서울공대 교수) 소개로 첫 만남에서 2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던 (30분정도 기다린 후에 그 장소를 떠나려하자 후배가 애걸하며 못가게 말려서 결국 꼬박 2시간여의 기다림끝에 나타난 우리 첫 만남의 사연은 단편 소설을 쓸만한) 그 여대생이며, 마침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20년 선배이신 장인 어르신이 당신의 은사이신 우리 교수님을 통해 적극적인 압력(?)을 넣어서 1년여만에 교수님의 주례로 결혼하게 되었다. 1979년 결혼할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하여 해군사관학교에서 5분대기 소대장을 맡고 있는 동안 서울 출장을 갈 수 없어서 결혼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소대장 임무를 마치고 교대한 후에 사관학교장의 특별휴가를 허락받아 3일전에야 서울에 올 수 있어서 겨우 결혼식을 할수 있었다. 그렇게 해군장교 복무시 결혼하여 진해에서 (직업 군인이 아닌) 학사장교 (사관학교 교수)의 박봉으로 애국적(?)이고 소박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벌써 40여년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눈에 선하다.

– 그동안의 여행과 추억에 가장 남는 곳?

여행에서 돌아오면 항상 수집해온 정보, 메모, 사진들로 아내가 스크랩북을 만들어 놓는데, 여러 여행중에서 Hungary Budapest에서 Amsterdam까지 Danube강과 Rhine강을 따라 강변의 여러 나라(Hungary, Slovakia, Austria, Germany, Netherlands) 유명 도시들을 구경하는 Grand European River Cruise와 지중해-아드리아해 연안 크루즈 여행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데, 유럽 각국의 강 (다뉴브, 메인, 라인강) 수로를 수십개의 갑문(Double Lock)으로 연결한 운하에서 운행하는 크루즈 여행과 거대한 바지선으로 끊임없이 화물을 운반하는 것을 보고 라인강 기적의 한 단면을 볼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4대강 운하 사업으로 떠들석 할 때였다. 크루즈 여행의 장점은 주변 도시를 여행하면서 항상 무선 네트워크 와이파이 연결이 가능하여 휴가중이지만 필요할때 언제든지 회사와 연결하여 일할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여행중에 미국방부 프로젝트 수상소식을 통고받고, 그 날 저녁에 우리 여행 그룹 전체에게 자축 와인을 샀던 기억도 새롭다. 몇년뒤에 신혼의 아들부부와 함께 3주간 버스투어로 프랑스 전국을 일주했을 때가 가장 즐거웠고, 이탈리아 전국을 일주하는 버스투어와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과 아일랜드를 일주하는 버스투어도 빼놓을수 없는 추억의 여행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Wien)와 할슈타트 (Hallstatt), 독일의 쾰른 (Cologne), 이탈리아 플로렌스 (Firenze), 영국 바스 (Bath)가 추억에 남는 장소이며 가 볼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 취미생활은

한국인 대부분의 공통적인(?) 취미로 간주되는 독서가 어렸을 때부터 나의 취미이기도 한데, 어렸을때는 아버지께서 사다주시는 책들, 주로 위인전, 단편, 문학전집을 위주로 독서를 했고, 커서는 (원래 고교때도 문과생이었던 관계로) 특히 인문사회과학, 역사, 철학 그리고 인물 평전을 중심으로 다독하는 편이며, 이것은 직업때문에 과학기술 논문이나 전문 서적을 섭렵해야 하는 의무감과는 전혀 다른것이다.

결혼후에는 클래식 뮤직 매니아인 부인을 따라 음악 감상과 여행도 취미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집안 전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어디를 가도 하루종일 음악이 흘러나와 때로는 귀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집안의 평화를 위해 그냥 참고 지낸다. 주말에 친구나 동문들과 함께 Trail을 따라 걸으며 대화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골프는 하지 않는다. 드럼을 배우겠다고 드럼세트를 사 놓은지 10년이 넘어도 손을 못 댔는데 은퇴후에 할 일중에 일 순위가 될지도 모르겠다.

– 서울대 미주동창회에 바라고 싶은 점

금년은 COVID-19 Pandemic으로 어려운 시기임에도 미주총동창회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시는 신응남 회장님을 비롯한 동창회 임원 여러분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특히 동창회보 편집위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은 훌륭한 회보편집에 찬사를 보냅니다. 미주 동창회에 바라는 몇가지 소견을 말씀드리면, 첫째로, 미주동창회와 지역동창회의 세대교체 문제 입니다. 지금까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1세대 위주의 현재의 서울대 미주동창회가 앞으로도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젊은 동문 (Young Generation)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하는데, 그 방법론을 지부와 본부 평의원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를 시작 해야합니다. 한가지 방법은 각 동문회 산하에 별도로 젊은 동문들끼리 SNUAA-YG활동을 하도록 유도하여 장기적으로는 자연스럽게 SNUAA를 이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50년 역사의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KSEA)에서 시행하여 성공적인 방법으로 증명되었으므로, 우리 동창회가 이 방법을 배워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 할 것입니다.

둘째로, 미주 동창회의 역할에 관한 문제입니다. 전국에 있는 동문들의 구심점으로서 각 지부와 서울대 본교의 소통에 있어서 지원과 가교 역할을 넗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에 미주평의원회의에서 회칙으로 ‘장학위원회’ 와 ‘나눔위원회’를 설치하고 활성화 하자는 결의에 따라, 각 지부의 의견을 수렴했던 것으로 압니다. 진행사항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점검하고, 추진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워싱턴지부에서는 공식적인 의견 도출을 위해 공론화한 적은 없으나, 좋은 취지를 실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과 자원에대해 미주동창회와

지역동창회 차원에서 논의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Digital Transformation의 추세에 따라 미주 동창회 Newsletter가 이미 Digital Format으로 바뀌는 상황이므로, 이 digital newsletter(PDF file)를 현재 동문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동문들에게도 널리 전달하여 동창회에 참여를 유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Newsletter를 꼭 출판해야 할 경우에는 비용에서 큰 차이가 없다면 현재의 월간신문 형태에서 월간잡지형태로 발간하면 어떨지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렇게하면 보기에도, 읽기에도, 필요한 경우 보관하기에도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의 신문 형태는 편집, 출판, 배송에서나 받아서 보기에도, 읽기에도, 보관하기에도 불편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서울대 후배동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지 서울대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기를 당부한다.

한국사회에서 선택된 소수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우리 서울대인들이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많은 혜택을 사회에 진출해서도 계속해서 우리만의 당연한 특권으로 여기는 추한(?) 자만심보다는, 이제는 국가와 사회에 우리가 그동안 받은 혜택에 보답하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과 긍지를 갖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소한 우리 모두 부끄러운 서울대인이 되지 않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또한 미국사회에서 성공한(?) 훌륭한 동문들이 많으므로 그들의 경험을 여러 동문들과 공유하면 좋을것 같다. 저 개인의 경우 40여년간의 과학기술분야 전문직을 통해 외국인(특히 한국인)으로서 일반적으로 겪게되는 어려움과 한계를 이해하고 극복해나가는 경험들을 과학기술자협회 (KSEA) 행사에서 이제 갓 졸업하여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젊은 과학기술자들과 공유하여 좋은 반응을 경험했었다.

<백옥자 조직국장>

 

이력사항

* 서울대에서 전기공학 학ㆍ석사

* 1978 해군 사관학교 교수

* 1980 해군사관학교 전기공학과 학과장

* 1981년 대한전기협회 박사과정 유학장학생으로 선정

* 1981년 해군복무 마친후 도미 유학

* 1986년 University of Florida, Gainesville에서 광통신소자 및 시스템 분야에서 박사 학위

* 캘리포니아 공대 (칼텍ㆍCaltech) 소속인 미국 NASA 항공우주센터 제트추진연구소에 입사하여 Senior Scientist 겸 Task Manager로 5년 근무.

* 1991 보잉사로 스카우트되어 Boeing High Technology Center가 있는 시애틀로 이주.

* 1991-2007 Boeing 연구소에서 Phantom Works Awards를 비롯한 30여개의 기술개발상과 10여개의미국 특허 (US Patent)

**2009년에 보잉사 대표로 ‘Asian-American Engineer of the Year Award’상 수상

*1997년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시애틀 지부 회장

* 2008년 워싱턴주 서울대 동창회 회장

* 2010년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KSEA) 회장

* 2013년 시애틀ㆍ벨뷰 통합한국학교 이사장 겸 워싱턴주 한미교육문화재단 이사장; 3 연임 6년간 재임

*2011-2020년 시애틀ㆍ벨뷰 통합한국학교 이사, 워싱턴주 한미교육문화재단 이사

*2000-2010년 IEEE Monthly Technical Journal ‘Communications Letters’ Associate Editor

*2018년 IEEE (국제 전기전자공학회) Life Senior Member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상을 수상

*2013년 시애틀 영자신문 아시안위클리가 선정한 2013 최고공로상 수상

*2014년 한미연합회 ‘2014 Community Service Award’ 봉사상 수상

*2018년 두번째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2000-2021년 University of Washington 전기컴퓨터공학과 및 대학원 초빙교수 (Affiliate Professor)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