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_ 이정근 (사대 60)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던 까닭일까, 혹은 평양의 아리랑 대 축전 때문인가. 게다가 세계 아름다운 곡조 콘테스트에서 첫 손가락에 들었기 때문인가.

“‘아리랑’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미국사람들이 물어 오는데 대답이 꽉 막혔어요.” 최근에 그런 질문들을 몇 번 받았다. 음대 동문들도 있었다. 목사가 되기 전에 국어국문학을 강의했기에 당하는 괴롭힘(?)이었다. 그 전공을 내어버린 지가 벌써 45년이 넘기에 하는 말이다.

“저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아리송합니다. 여러 학설이 있기 때문이지요. 몇 시간 강의를 해도 모자라니까 전화로는 어렵습니다. 허지만 대답보다는 해답을 찾는 길을 알려 드리지요. 인터넷에서 구글(Google)에 들어가 ‘아리랑’을 치시면…..”

실망했던 터일까, ‘그것만도 감사하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기도 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는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교육적이지만 학자란 역시 융통성이 모자라는가 보다.

‘아리랑’의 말뿌리에 대하여는 유감스럽게도 정설이 없다. 여러 학설이 있지만 그것들이 대부분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아내 이름 ‘알령’에서 나왔다는 인명설, 아리령이라는 고개 이름 그리고 그것과 얽힌 전설에서 나왔다는 양주동 박사의 지명설, 고려 가요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처럼 노래에 넣는 무의미의 여음(餘音)이라는 설, 중국말 婀阿女郞 是女郞에서 나왔다는 중국 발원설, 몽골어 설, 김알지 설화처럼 ‘알’에서 나왔다는 주장, 아리랑/스리랑은 긴 고개를 뜻한다는 설, ‘가슴이 아리다, 쓰리다,’에서 나왔다는 설…..정말 각종 의견들이 설설설설 들끓는 수준이다. 게다가 아리랑을 我理郞이라고 한문글자로 써서 ‘자기를 아는 즐거움’을 뜻한다는 철학적 해석도 등장했다. (서정범 저 ‘국어어원사전,’ 위키피디아 등 참조).

그래도 추천할만한 해석이 하나 있다. ‘아리랑’의 아리는 ‘아리땁다’와 아름답다의 ‘아리’가 그 뿌리이고 ‘랑’은 신랑과 여랑(女郞)의 용례에서 보듯이 젊은 남녀 모두를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아리랑 고개의 ‘아리랑’은 길고 험악한 고개라는 뜻을 가졌다. 노래말이 반드시 단일의미로만 해석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애매모호하여 여러 가지로 해석될 때 더 운치가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첫 절은 ‘고운 님, 고운 님, 고운 님이, 높고 긴 고개를 넘어 간다’고 현대말로 푸는 것이 좋겠다.

한국의 대표적 민요는 대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곧 연애시라는 게 정설이다. 그것도 억압된 성적 욕망을 분출시키려는 제법 야한 노래들이다. ‘도라지’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고 ‘대바구니’는 여성의 그것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천안 삼거리’ 역시 그렇다. 이런 것은 무어 부끄러울 것도 없고 창피할 것도 없다. 유교문화에서 극도로 억압된 성욕,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말로 ‘좌절된 성적 욕구’가 분출된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오히려 색성(sex)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인데, 그걸 더럽고 악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바로 그 생각을 고쳐야 한다.

아무려나 이 아리랑이 찬송가에까지 들어와서 야단법석을 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니”를 첫 절로 하는 이 가사가 아리랑 곡에 맞추어 서양교회에서 불린다. 1986년에 폴마(Polmar)가 작사했고 그로텐휘스(Grotenhuis)가 편곡했다. 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에서 우리 주님 만났네”로 가사를 쓴 사람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 사랑해요, 하나님 아버지 고마워요, 나를 위하여 독생자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해요”(김정복 목사 작사)도 있다.

예수쟁이들이 별짓 다한다는 비판이 있겠지만 그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아리랑을 처음으로 오선지 악보에 기록한 사람이 바로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였다.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잘 알고,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인물이다.

아무튼 마지막 절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가 코리안들의 토라진 심정을 담은 공감대가 되기는 한다. 한국인 특히 한국여인들의 가슴병인 ‘한’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사의 의미는 좀 치기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뿌리치고 떠나가는 연인이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라고 저주하는 것보다는 그의 미래 행운을 비는 것이 더 건실한 정서 아닌가. 그래서 진달래꽃 한 아름 뿌려 보내겠다는 김소월의 시가 훨씬 돋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 아리랑 끝부분을 ‘십리도 못 가서 뒤돌아 보리’로 고치면 어떨까. 이별의 아픔이 더 좋은 희망을 생산하는 그런 노래가 되리라.

(한국일보 미주판에 최근 게재된 것을 수정 보완했음. 글쓴이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어교육 전공. 은퇴 목사이며 ‘코리안의 노래’ 작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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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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